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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Oct 11. 2024

성폭력 방지교육

짧은 소설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전 아직도 제가 왜 성폭력 방지 교육을 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전 정말 억울해요.

저 같은 사람한텐 이건 그냥 시간 낭비라고요.

아, 말하자면 긴데 좀 들어주시겠어요?


일주일 전 토요일이었어요.

저는 성실한 대학원생으로서 주말 중에 하루는 꼭 학교에 나가서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살았어요.

우리 연구실에는 저 말고도 그런 학생이 네다섯 명은 됩니다.

주말에 연구실에 나온 학생들끼리 같이 점심을 먹곤 하죠.

최근에 맛있는 제육볶음 도시락을 학교까지 배달해주는 집이 생겼어요.

토요일까지 학교 식당에서 먹기 뭐하니까 학생들끼리 도시락을 시키기로 했죠.

그런데 경무 형이 그날 나온 학생들 점심을 다 사준다는 거예요.

우리는 경무 형 만세를 불렀죠.

경무 형은 S전자에 다니며 파트 타임으로 우리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역시 S전자가 최고라니까.


건물 밑에 도시락이 왔다고 전화가 왔어요.

한 명만 내려가서 계산하고 받아오면 되는데, 그날따라 네 명 모두 경무 형을 따라서 내려갔어요.

경무 형이 사주는 거라 다들 미안해서 그랬나 봐요.

우리는 도시락을 받아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다시 연구실이 있는 4층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4층에 선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지 않는 거예요.

매일 타고 다니던 엘레베이터였는데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어요.

엘레베이터 안 비상벨을 호출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토요일에 연구실에 나온 네 명이 모두 갇혀 버린 터라 딱히 연락할 만한 사람도 없었죠.

저는 당황했어요.

누군가 경비 아저씨가 점심 먹으러 갔을 거라고 말했어요.

다른 누군가가 그럼 우리도 도시락을 먹자고 했어요.

그렇게 우리는 엘리베이터 바닥에 앉아서 제육볶음 도시락을 먹었어요.

남자들은 단순해요.

배고프면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먹거든요.



저는 언제까지 그 안에서 기다릴지 몰라서 일부러 천천히 먹었어요.

그래도 20분쯤 지나니까 숟가락으로 마지막 밥풀을 뜯어 먹고 말았죠.

우리는 도시락을 다 먹고 비상벨을 다시 눌러봤어요.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었어요.

경무 형이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119에 전화해보자고 했어요.

아, 119가 있었지.

그런데 저는 긴장해서 그런지 자꾸 오줌이 마려웠어요.

도시락을 먹으면서 준 된장국을 마셔서 그런지 더 마려운 것 같았어요.

게다가 엘리베이터 내리면 바로 오른쪽으로 화장실이 있는데 그걸 못가니까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소변 참는 것에 안 좋은 트라우마가 있어요.

아, 이 얘기까지 하면 정말 길어지는데 그래도 다 연결된 거니까 들어주세요.


예전에 대학생 때 P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포항에 간 적이 있어요.

버스를 타고 갔더니 한 5시간 걸리더라고요.

길어서인지 휴게소에 두 번 들리더라고요.

저는 초행길이라 원래 포항까지는 휴게소에 두 번 들리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잠결에 귀찮아서 휴게소를 그냥 지나쳤어요.

서울에 거의 다 와서 잠이 깼는데, 소변이 너무 마려운 거예요.

길은 막히지, 도착까지 남은 휴게소는 없지.

와 진짜 사람 미치겠더라고요.

그때 정말 지옥을 맛봤어요.

그날 어떻게 됐는지는 묻지 마시고요.


아무튼, 그날 일이 지독한 트라우마로 남아서 저는 절대로 소변을 참지 않아요.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변을 봐야겠다고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죠.

남자들끼리 다들 이해해주더라고요.

남자들은 단순해요.

마려우면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싸거든요.

저는 도시락 배달할 때 준 비닐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갔어요.

그리고 바지를 내리고 비닐봉지 안에 소변을 보기 시작했어요.

많이 참았던 터라 오줌발이 굵고 시원하게 쏟아졌어요.

나이아가라 폭포수라고 하면 좀 과장이고, 이과수 폭포 정도는 된달까?

그런데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문 앞에 서 있는 옆 연구실 여자 후배랑 눈이 딱 마주쳤어요.

당연히 폭포수를 끊을 순 없었죠.

마음대로 끊기면 그게 폭포수겠어요?


그렇게 해서 제가 지금 성폭력 방지 교육을 듣고 있는거라고요.

학교 측에선 이거라도 들어야 피해자가 형사 고소를 안 한다고 하니 꼭 들어야 한대요.

전 너무 억울해요.

제가 바로 피해자라고요.

학교에서는 왜 엘리베이터 점검을 제대로 못해서 제가 이런 피해를 봐야 하는 거죠?

게다가, 피해자랑 마주칠 염려가 있으니 앞으로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라니요.

그럼 저보고 4층까지 맨날 걸어다니라고요?

전 졸업할 때까지 3 년은 더 남았는데요.

저는 정말로 너무 억울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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