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난 노인과 여자가 각자 가진 비밀을 털어놓는다.
미국 시카고를 현지시각 2011년 3월 10일 오후 7시에 출발한 일본 도쿄행 비행기의 조종실 안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도쿄에 위치한 관제탑으로부터 조종실에 교신이 전해진 뒤였다. 교신 내용은 지진으로 인해서 도쿄 인근의 모든 공항에서 비행기 이착륙이 제한되었으니, 다른 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곧 홋카이도로 방향을 틀었다. 기장을 통해 교신 내용이 탑승객들에게도 전달되었다. 비행기 안이 웅성거렸다. 탑승객의 절반가량은 일본인이었고, 다른 절반은 도쿄를 경유해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인들은 피해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했고, 한국인들은 당장 홋카이도로 가면 한국으로 가는 경유 편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했다. 승무원들은 항공사로부터 연락을 받는 대로 즉시 알려주겠다며 승객들을 달랬다. 모두가 지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몰랐으나, 공항이 폐쇄될 정도면 진도가 꽤 높다는 것을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 시각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고, 예정대로라면 도쿄에 도착하기 5시간 전이었다.
비행기가 도착한 곳은 홋카이도에 위치한 치토세 국제공항이었다. 일본이 최종 도착지인 승객들만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나머지는 ‘안전한’ 비행기 안에서 경유 편이 마련될 때까지 대기하였다. 절반가량의 탑승객이 빠져나가니 비행기는 한결 여유로워졌다. 옆자리 팔걸이를 올리고 좌석에 가로로 눕는 승객들도 있었다. 승무원들은 남은 승객들에게 물수건과 음료를 날랐다. 승무원도 승객도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 누구도 얼마나 대기하게 될지 몰랐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알 수 없음’에 대처했다. 어떤 이는 승무원들에게 재촉하였고, 어떤 이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더 흘렀을 때에는 모두가 힘들어했다. 원래 ‘무지(無知)’란 견디기 힘든 법이다.
“딸애한테 다녀오는 길이에요. 딸이 미국에 살거든요.” 머리가 제법 희끗한 남자 한 명이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비즈니스 석에서 뒤로 다섯 칸 정도 떨어져 있는 이코노미 좌석의 승객이다. 주변 좌석의 절반가량은 비어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재미있게도, 그들은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다. 여자는 긴 검은색 머리에 하얀 얼굴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창백해 보였다. 청바지에 회색 블라우스, 그리고 검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에 화장기도 거의 없는 편한 차림으로 보아 휴가를 다녀오는 듯한 인상이었다. 남자도 역시 편한 차림으로 검은색 면바지에 하늘색 남방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절반 이상이 하얀 것처럼 보였는데, 그에 비해 얼굴은 비교적 젊어 보였다.
“그러세요. 좋으셨겠네요. 얼마 만에 뵙는 건가요?” 남자가 갑자기 건넨 말에 뜻밖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옅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여자는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눌 속셈으로 남자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에 딸애가 한국에 다녀갔을 때 봤으니까,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거예요. 내 유일한 자식이라오.” 여자의 질문이 반가웠는지, 남자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남자는 약간 뜸을 들인 뒤에 말을 이었다.
“젊은 아가씨는 휴가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아가씨라고 불러도 되나?” 남자는 여자가 결혼한 지 안 한지 몰랐기 때문에 호칭을 어떻게 몰랐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모든 일에 조심스러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네,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했으니까 아가씨가 맞네요. 그리고 휴가 다녀오는 것은 아니고, 미국에 있는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식품회사에 다니고 있거든요. 저희 회사가 미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하고 있는데, 이번에 가서 수입할 농산물을 살펴보고 왔어요.” 여자도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여자는 시카고 인근 일리노이 주에 위치한 옥수수 가공 공장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정장 차림으로 공장 내부를 둘러보다가 먼지를 뒤집어썼다고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수입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근처 아웃렛에 들러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를 샀다고 했다. 그 말까지 하고 나니, 여자는 출장의 목적을 잘 달성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청바지는 자신에 대한 소박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젊은 아가씨가 대단하시네. 혼자서 그런 일을 다 하시고. 그럼 다른 곳으로도 여행을 아주 많이 다니겠어요. 나도 직업 때문에 세계 곳곳을 많이 돌아다녔지요. 지금은 은퇴했지만.” 남자는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여자는 궁금한 듯 물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교수였지. 일 년에 한두 번씩 해외 학회에 나가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어요. 유럽은 거의 모든 나라를 가본 것 같고, 동유럽 몇 개국만 빼고, 남미에도 몇 번 가봤지요. 이제는 힘들어서 그렇게 멀리까지는 못 갈 것 같지만.” 남자는 과거를 회상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짧은 순간이지만, 여자와의 대화가 즐겁다고 느꼈다. 그것은 여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남미는 한번 가봤어요. 출장으로 칠레에 한 번 가봤어요.” 여자가 반가운 듯 말하며 덧붙였다.
“그런데 제가 가는 곳은 전부 시골이에요. 중국에 고추 사러가도 시골이고, 칠레에 포도를 사러가도 시골이고 그래요. 관광은 꿈도 못 꿔요. 늘 그렇게 다른 나라 시골만 돌아다니죠. 가족들도 몇 번을 같이 가보더니, 이제 같이 갈 생각을 안 해요. 시골은 어느 나라든 다 똑같은 시골이거든요.” 여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군요. 저도 예전엔 집사람과 딸과 같이 출장을 다니곤 했지요. 학회는 주로 대도시나, 휴양지에서 하거든요. 낮에 저는 학회에 참석을 하고, 집사람은 딸애를 데리고 시내 관광을 하곤 했지요. 그때가 좋았어요. 가장으로서 왠지 위신도 섰고.” 남자가 말했다.
“딸애는 이제 다 커서 미국에 자리를 잡았고, 집사람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서, 저 혼자 남았지요. 갑상선 암이었어요. 갑상선 암은 대체로 완치되는데, 집사람을 괴롭힌 건 아주 나쁜 놈이었죠. 진단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허망하게 갔어요. 내가 건강 검진을 받을 때, 억지로라도 데려가서 검진을 받았어야 하는데.” 남자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저도 회사에서 건강 검진을 받을 때, 엄마에게 같이 받자고 늘 말씀드려도 이래저래 핑계를 대시며 안 받으려 하시더라고요. 그 연세 분들이 다들 그러시잖아요.” 여자가 남자를 위로하며 대답했다.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비행기가 치토세 공항에 착륙한 지 세 시간가량이 지났다. 승무원들은 비행기에 남은 승객들이게 이미 음료를 한 번 제공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곧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데, 아직 본부로부터 이에 대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비행기 안에 남은 사람들은 잠을 자거나, 대화를 하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부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도쿄 인근의 지진 상황을 검색하였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였다. 무엇보다 지진 해일로 인해서 인명피해가 심각했고, 원자력 발전소 일부가 파손됐다. 방사능 유출에 대한 우려가 일본 지진과 함께 한국의 모든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 순위를 잠식하고 있었다. 소식은 닫힌 공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비행기 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진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대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당장 겪는 불편함의 해소가 우선이었다. 사람들은 집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어 했다.
“사모님을 잃고 나서 상심이 컸겠어요.” 이번에는 여자가 먼저 대화를 이어갔다.
“딸애도 나도 굉장히 힘들었지. 딸애는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제 어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장례식이 끝났는데도 한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방황을 많이 했지. 그 녀석을 달래서 미국으로 다시 보내느라 나도 힘들었어.” 남자가 대답을 한 뒤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마른 입을 축이려는 듯 앞에 있는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넣었다.
“힘드셨겠네요. 이런 질문드리면 조금 뭐하지만, 사모님이 돌아가신 때가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나요?”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나이쯤 되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중에 무엇을 더 후회하는지 알아요? 그건 바로 하지 않은 일이에요. 나는 결혼 생활 동안 가정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소. 집사람이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에도 옆에서 간절하게 간병을 했지. 그런 나도 젊은 시절 집 사람을 떠나려 한 적이 있었다오. 그때가 아마 심적으로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집사람과 같이 산 걸 후회하진 않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어요.” 남자는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이었다.
“집사람과는 집 안에서 아는 사람들을 통해 중매로 만나서 금세 결혼했다오. 그때는 다들 그랬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정해졌는데, 집안 어르신들은 결혼하지 않으면 유학을 안 보낸다고 그러시며, 자연스럽게 주변의 선 자리를 많이 알아보셨지. 그렇게 알게 된 여자와 몇 번 만나보지도 않고 결혼하고, 미국으로 바로 유학길을 떠났어. 미국에서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어. 나는 부족한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지. 내 몸이 고단해서 그랬는지, 우린 젊었는데도 애가 들어서지 않았어. 내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교직을 시작할 때까지 결국 애가 생기지 않았었지. 당시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여자가 죄인이었어. 아마 집사람은 집안 어른들에게 역정도 많이 들었을 게야.” 남자는 어느덧 여자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묵묵히 듣고 있던 여자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한국에서 교수를 시작한 것이 내 나이 서른세 살이었어. 결혼한 지 5년이 흘렀을 무렵이지. 그때, 한 여자가 내 눈에 들어왔어. 그녀는 내가 있는 학과 행정실의 사무원이었지. 새 학기가 시작하고, 적응이 아직 안됐을 때, 내 일을 친절하게 많이 도와주었어.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듯했어. 나는 별 일이 없는데도 그녀가 보고 싶어서 행정실에 자주 들렀지. 그녀는 커피가 싫다며 율무차를 주로 마셨는데 내가 그것을 가지고 촌스럽다며 놀렸던 기억이 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많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지. 와이프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어. 아주 강렬했어. 그녀를 볼 때마다 진도 9.0의 강진이 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았어. 그런 내 마음이 은근히 그녀에게 전달되기를 바랐지만, 그럴수록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지.” 남자는 다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여자는 계속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정말 사모님을 떠나시려고 하셨나요?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돼서?”
“그건 나도 모르겠어. 내가 그만한 용기가 있었는지 나도 몰라. 하지만, 그 무렵 아내가 딸을 가지게 됐어. 그리고 곧 그 여자를 향한 마음을 단념하려고 노력했어. 아내와 태어날 자식에 충실하기로 결정한 거야.” 남자가 말했다.
“그 마음이 그렇게 쉽게 단념이 되던가요?” 여자가 물었다.
“쉽지 않았어.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모든 걸 뛰어넘어 가정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 앞에 정해진 평탄한 길이 훤히 보이는데, 내가 선택한 다른 길이 가시밭길이 될지, 꽃길이 될지 알 수 없었거든. 그 ‘알 수 없음’이 두려움이 되어 어느덧 내 감정을 압도해버렸지. 나는 결국 그런 인간이었던 거야.” 남자가 아래로 쳐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만약 그 여자 분도 선생님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요?” 여자는 조용하게 물었다.
“나도 그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지. 그녀도 나를 좋아하길 바랐지만, 실제로 나를 좋아한다면, 어떻게 될까? 글쎄. 그건 지금도 잘 모르겠어. 만약 그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했더라면, 그건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였을 거야.” 남자가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윽고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시간의 위대함이 뭔지 알아? 예전엔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 시간이 지나면 사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지. 그 일은 그 당시에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자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어.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봤지. 하지만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고, 그녀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몇 년 뒤에 결혼하고 직장을 떠났거든. 그 후로는 소식도 모르고.”
남자는 물 잔에 든 물을 다 마셔버린 후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떴다. 좁디좁은 비행기 화장실 변기에 앉아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너무 긴 세월이었다. 자신이 그녀를 좋아했다는 강렬한 감정은 이제는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남자는 거울 속 흰머리가 무성한 자신을 한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검디검은 머리를 가진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 여자분은 사모님에 비해서 뭐가 그리 달랐을까요?”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남자에게 여자가 물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당시에는 여자에 대해서 몇 가지 색깔밖에 볼 수가 없었지. 그녀는 참 예뻤어.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전형적인 미인 형이었지. 게다가 친절하고 싹싹한 성격까지. 뭇 남자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여자였어.”
“그 여자분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이렇게 늙어버려서 이제 뭘. 그냥 내게 남은 시간은 호수처럼 고요하게 살다 갈 거야.” 남자는 평온한 미소를 띠며 여자를 바라봤다.
기내에 울리는 안내방송 때문에 둘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곧 식사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 편이 언제 마련되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불평이 나왔다.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일부 승객들은 한국의 항공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경유 편 마련에 대한 대책을 닦달했다. 그러는 사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홋카이도에서의 밤은 깊어 갔고, 그에 따라 기내 조명이 어두워졌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둘씩 눈을 감기 시작했다. 이윽고 비행기 안은 서서히 조용해졌다. 일부 사람들은 기내의 좌석 전등을 켜놓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어둠 속에 있었다. 기내식을 먹은 뒤로, 둘 사이에 간헐적인 대화가 이루어졌으나 주로 신변잡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여자는 서울에서 홀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식품회사에 취직한 것이 5년 전이었다. 일을 빨리 배우고 열심히 한 덕분에, 회사에서 점점 존재감이 커지고 있었다. 여자는 입사할 때부터 구매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영어면접에서 출중한 실력을 보인 것을 구매팀장이 좋게 봐서 자신의 팀으로 데려왔다. 처음에는 각종 식품의 수입에 필요한 구매절차 및 통관절차 등의 서류업무에 투입되어 일을 했다. 그리고 주요 수입품목인 고추, 밀, 콩 등을 판별하는 법과 수입한 농산물을 저장하는 창고를 관리하는 일을 배웠다. 2년쯤 지나자, 직접 식품 구매를 위해 해외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구매 팀에는 총 10명의 직원이 있는데, 모두 해외 출장이 잦은 나머지, 직원 모두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 출장 가는 날이 서로 어긋나면 심지어 한 달에 한 번 마주치는 사람도 있다고, 여자가 말했다. 연말 회식 때가 되어야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후, 다음 연말을 기약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계약은 팀장이 직접 챙겼다. 팀장은 40대 초반의 남자로, 여자가 졸업한 대학교를 나온 학교 선배였다. 여자는 첫 해외출장을 팀장과 함께 갔다. 3년 전, 회사에서 새 제품을 기획 중일 때, 생산팀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고추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했다. 정식 수입하기 전에 가져온 샘플의 품질에 대한 것이었다. 팀장은 곧 중국으로 갈 비행 편을 알아보며, 여자에게도 일을 배울 겸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일은 결국 팀장님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고추의 건조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인데, 팀장님이 다시는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말하며, 그 중국 회사에 강하게 항의를 했어요. 건조 시간이 짧으면, 배로 바다 건너서 한국에 들어올 때 바다 위에서 문제가 발생해요. 그런데 중국 회사 입장에서는 생산 단가를 낮추려고 건조기 돌리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하거든요. 결국 중국 회사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죠.” 여자가 말했다.
첫 해외 출장에서 여자는, 평소 사무실에서와 다른 팀장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마치 전쟁터에서 열렬히 싸우는 전사가 떠올랐다. 사무실에서 팀장은 늘 누구에게나 자상했다. 회사에서 구매팀은 전쟁으로 따지자면 첨병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질 좋은 물건을 값싸게 판다는 곳이 있으면, 지구 상 어디라도 찾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팀장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팀원들의 안전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거래하러 간 곳이 본인이 판단하기에 위험하다고 느끼면, 거래보다 본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라고 평소에 팀장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십 년 넘게 세계 곳곳을 누빈 이 비즈니스맨이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후 내린 결론이었다. 낙후된 개발도상국과 내전이 일어난 나라의 인접 국가들과도 거래를 했지만, 아직까지 구매팀에서 이렇다 할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사무실과 현장에서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보고 팀장에게 알 수 없는 설렘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부터 여자는 팀장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팀장이 지시하는 출장에 이의를 달지 않았고, 팀의 궂은일을 적극적으로 맡았다. 회식 날, 술이 들어가면 간혹 들려주는 팀장의 옛날 얘기가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회식 날에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는 팀장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루는 구매팀이 외국 생산업체와 대형 계약을 맺어, 축하할 겸 오랜만에 회식을 하던 날이 있었다. 계약은 팀장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국내의 다른 업체와 경쟁이 있었으나, 결국 여자의 회사가 계약을 따냈다. 팀장과 여자가 함께 현지 업체를 방문해 수완을 발휘했다. 이렇게 수입한 농산물은 여자의 회사에서 유통 마진을 남기고, 국내의 다른 회사들에 넘길 수 있었다. 구매팀에 특별 상여금이 지급됐다. 기분이 좋았는지 그날따라 팀장은 술을 많이 마셨다. 여자도 팀장 앞자리에 앉아 한잔 두 잔 받아 마셨다. 팀장은 이번 계약 건에 여자의 공이 크다며 팀원들 앞에서 여자를 추켜세웠다. 취한 팀장은 앞에 앉은 여자의 손을 덥석 잡고 힘껏 위로 올리며 ‘박수’를 외쳤다. 순간 여자는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은지, 우쭐해져서 기분이 좋은지 헷갈렸으나, 자신이 앞에 앉은 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절대 헷갈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가씨는 그 팀장이란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남자가 여자에게 슬며시 말했다.
“좋아하는 감정 반, 존경하는 감정 반이에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유부남이자 두 아이의 아빠인데. 꼭 선생님이 젊은 시절 좋아했었던 그 여자분의 입장이네요. 제가.” 여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답했다.
“팀장님도 혹시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나?” 남자가 되물었다.
“네, 어느 날 갑자기 제 입에서 툭 튀어나와버렸어요. 얼마 전 같이 출장 다녀오는 길, 차 안에서요. 비 오는 날이었고, 서로 말없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조용한 음악을 듣고 있었어요. 문득 팀장님을 좋아한다고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어요. 그러자 팀장님은 당황한 듯 운전대에 올린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더니, ‘이거 큰일 났네.’ 이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저를 쳐다보며 자기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했어요.” 여자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어요. 하지만, 그 후로 달라진 건 없어요. 우리는 여전히 팀장과 팀원 사이예요. 사무실에서 마주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서로 평소처럼 대해요.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없고요. 점심식사도 늘 다른 팀원들과 같이 해요.” 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여쭤 봤던 거예요. 혹시 선생님께서 좋아했던 그 여자 분도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이요.” 여자는 남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 팀장이란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아마 그 시절 나처럼 괴로워하고 있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아가씨는 그 남자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해요.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남자는 남은 인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 테니까.” 남자가 말했다.
“저도 불륜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팀장님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일 거라고 생각은 안 해요.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니까. 아직 확신이 없겠죠. 저와 함께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 될지, 꽃길이 될지.” 여자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피곤해서인지 감정이 올라와서인지 불분명했다. 남자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보통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들이라면, 아마 가정을 버리지 못하면서 상대방 여자와 연애 감정만 느끼려고 할 거야. 아내와 여자 양쪽 모두에게 책임감 없는 짓이지. 하지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후 팀장이 보인 태도는 그런 것 같진 않군. 신중한 태도로 보아, 나처럼 가정을 지킬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뒤이어 상황을 뭉뚱그려 말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봄 오면 꽃이 피듯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 돼서야 원. 아가씨나 그 팀장이나 이 안타까움을 어찌할까? 안타까워.”
“그렇죠? 안타깝죠?” 여자가 슬픈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밤은 점점 깊어 자정을 넘긴 지 오래됐고, 주변은 모두 조용해졌다. 간혹 승무원 한 두 명이 객실을 오가며, 승객들이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남자와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일은 비행기가 마련이 될까요?” 여자가 뜬금없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렇게 되길 희망해야지. 안 그럼 폭동이 일어날 걸? 우리나라 사람들 성질 잘 알잖아. 허허. 밤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자야지.” 남자는 좌석을 최대한 뒤로 젖히고, 담요를 목 아래까지 올렸다.
“잘 자요.” 남자가 말했다.
“네, 선생님도 잘 주무세요.” 여자가 답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주위가 약간 부산해진 틈에 여자가 눈을 떴다. 몇몇 승무원들이 잠에서 깬 승객들에게 음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여자는 창문의 블라인드를 위로 올려 밝기를 확인했다. 아직 주위가 어둑어둑한 것이 아침이 밝아오려면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여자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6시가 안되어 있었다. 한국 시각으로 3월 12일, 월요일 아침이 오고 있었다. 여자는 본래 일요일에 한국에 도착해서, 월요일에 업무 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회사에는 아직 현재 상황을 전달하지 못한 상태라, 여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기내가 갑자기 환해지며 안내 방송이 울렸다.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 편이 마련되었으니, 안내에 따라 마련된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내용이었다. 기내에 가지고 있는 짐을 모두 가지고 내려서, 다른 게이트로 이동하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여자는 남자를 깨웠다.
“선생님, 일어나세요. 한국으로 가는 비행 편이 마련되었대요.”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치며 말했다. 남자는 눈을 떴다.
“갖고 계신 짐을 다 가지고 다른 게이트로 가야 한 대요. 선생님, 저랑 같이 가요.” 여자가 안내 내용을 남자에게 전달했다.
“아, 그래? 지금 몇 시쯤 됐지?”
여자는 현재 시각을 말해주었다. 주위의 승객들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승객들을 찾아다니며 깨우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는 머리 위에 실린 짐들을 같이 내렸다. 이윽고 승객들은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비행기에서 내렸다. 여자와 남자도 다른 승객들을 따라 통로로 이동했다.
그 후로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여자와 남자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탑승 후 비행이 안정에 들어갔을 때, 기장은 승객 여러분들에게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하다며 거듭 사과 방송을 했다. 승무원들은 곧 식사를 나눠줄 준비를 했다. 승객들은 배가 고팠는지, 아침으로 나눠준 비빔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남자와 여자도 주린 배를 채우는 동안 말이 없었다. 마지막 밥숟가락을 입에 넣은 남자는 같이 나눠준 미역국을 다 들이켰다. 여자도 식사를 마쳤다.
“일주일 만에 쌀밥을 먹으니, 살 것 같네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역시 국적기가 좋아.” 남자가 답했다.
앞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남자는 비행기를 바꿔 탈 때, 가져온 한국의 조간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문에 3월 12일, 월요일 날짜가 찍힌 것을 본 뒤, 월요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되는 500밀리리터 우유 한 팩이 생각났다. 집에 도착하면 잊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둬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면세품 카탈로그를 넘겨보고 있었다. 남성용 향수에 눈길이 갔다. 팀장님에게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지만, 이내 카탈로그를 접는다. 그것을 본 남자가 신문을 접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만약에 말이야, 그 팀장이란 사람이 아내 몰래 아가씨하고 연애만 하자고 하면 아가씨는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바람피우는 뭇 남자들이 그러듯이 말이야.” 남자는 궁금한 듯 물었다. 여자는 이미 그 점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는 싫어요. 가서 아내와 이혼하고 오라고 할 것 같아요. 그러면 팀장님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불륜녀가 되는 것은 싫어요.” 여자는 대답했다.
“이미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앞서가고 있는데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오래 살아보니, 세상 모든 일은 아가씨가 구매 계약하는 것처럼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거든.”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처음엔 단둘이 하는 커피 한 잔이 될 수도 있고, 다음엔 저녁 식사가 될 수도 있어. 두 사람 다 업무상 만나는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 시간들이 너무나 즐거워서, 다음에 또 단둘이 만나고 싶을 거야. 아마 계속 이렇게 합리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이 올 거야. 둘이 연인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게 하거든. 그런데 그걸 피하고 싶지 않게 되지. 그 강렬한 감정을 피하고 싶겠어? 나한테 어떻게 찾아온 사랑인데.”
“선생님, 저도 그렇게 될까요?” 남자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여자가 되물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런데 세상살이엔 정답이 없더군. 그냥 한쪽을 선택하고, 이게 정답이려니 의심 없이 살아가는 게, 그게 정답이야.” 남자가 여자의 물음에 답했다.
시간이 더 흘러, 기내에는 인천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여자는 뒤로 젖혀 있던 의자를 바로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남자는 바지 주머니 위로 만져지는 지갑을 느끼고,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여자에게 주었다.
“혹시,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요. 시간 많은 늙은이니까.”
명함에는 남자가 교수로 있었던 대학, 학과,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은퇴하기 전에 명함을 많이 만들었는데, 아직도 다 쓰질 못했네 그려.”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명함을 건네받은 여자는 명함을 청바지의 주머니에 넣고, 머리 위 짐칸의 짐에서 자신의 명함을 찾으려 했다.
“아가씨 명함은 안 줘도 돼요. 그냥 아가씨가 나중에 답답해서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면 그때 연락해요. 우린 공통점을 한 가지 가지고 있잖아. 허허.”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언제 한번 연락드릴게요.” 여자가 답했다.
비행기는 점차 속력을 줄여가며 고도를 낮추었다. 얼마 후 인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많은 승객들이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었다. 하루 늦게 한국에 도착했지만, 곧 집에 갈 수 있다는 기대에 흥분했다.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하고,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졌을 때, 승객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도 각자의 짐을 챙겼다. 사람들이 곧 비행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여기에서 헤어져야겠네요. 오는 동안 대화 즐거웠고요. 집에 안녕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꼭 연락드릴게요.”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남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가씨도 집에 잘 들어가요. 아니, 곧장 회사로 가나? 허허.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봅시다.” 남자가 작별에 응했다.
여자가 먼저 통로로 빠져나갔다. 남자가 뒤를 이었다.
남자는 줄을 서서 입국 심사를 기다렸다. 입국 심사가 끝나고 바로 짐을 찾는 곳으로 갔다. 컨베이어 벨트 건너편에 여자가 보였으나 남자는 제자리에서 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을 기다리자 남자의 검은색 가방이 나왔다. 남자는 가방을 찾아 캐리어에 싣고 입국장 문 쪽으로 향했다. 먼저 짐을 찾고 나온 앞쪽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여자가 보였다. 남자가 뒤이어 입국장 문을 통과한 뒤, 여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여자는 아는 사람이 마중을 나온 듯했다. 그 사람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였다. 남자는 대화 중인 여자의 뒤편으로 캐리어를 밀고 지나갔다. 문득 여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응, 어제부터 계속 여기저기 알아보고, 출근하는 길에 마중 왔어.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여자로부터 멀어질수록 남자는 더 이상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한참 걸어서 공항 밖으로 빠져나갈 때, 남자는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처음 만난 위치에서 팀장과 얘기 중이었다. 막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는 자신과 달리, 멀리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여자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