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놓되 놓은 것 같지 않게
미국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서로가 한국인들임을 알게 된 후에도 영어로 계속 대화하는 것은 몹시 어색한 일이다. 우리는 영어권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어로 말할 때 우리는 단어를 사전에서 하나씩 떼어 내어 나열하는 것처럼 말한다.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단어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그 단어들이 문장에서 한데 뭉쳐졌을 때에 내는 느낌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는 사전적 의미들 이상의 뜻을 지니지 못한다. 의사소통의 본질을 서로 간에 객관적인 정보를 주고받는 것으로 본다면 이보다 더 효율적이고 간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끼리의 의사소통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어에서는 서로 간에 오가는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들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을 떠받치는 문법과 어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때로는 말을 담은 그릇이 그 안에 담긴 말보다도 더 눈에 띄고 화려하며, 전달받은 이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의사소통에 이미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으므로 포장지를 제대로 씌우지 않은 채로 서로와 말을 주고받을 때 오히려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문법에 오류가 많은 영어’로는 한국어처럼 문장 하나하나에 수많은 뜻을 겹쳐서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에 왔음에도 서로와 대화할 때 한국어에 의존한다.
문제는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같이 섞여 있을 때 발생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에게 말을 전할 때만 한국어를 사용하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의사소통에 한국어에 가까운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존비어와 관련되어 있는 한국어 문법들이다. 영어에서는 주어를 생략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어쩔 수 없이 ‘You’라는 말로 서로를 가리키게 된다. ‘너’나 ‘당신’으로 번역하여 생각하지 않고 ‘You’로만 생각하기 위해 머릿속을 비운다. 서로 간에 한국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를 굳이 한국어라는 렌즈를 통하여 관측하지 않는다. 말을 둘러싼 포장지가 흐려져 그것이 무엇인지만 겨우 전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그렇듯 말을 놓되 놓은 것 같지 않은 모호한 형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대화를 마치고 헤어질 때 외국인들에게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한국인들에게는 고개를 숙인다. 오류가 난 것처럼 어색한 동작과 함께 방금까지 주고받았던 대화가 사실은 몹시 이상한 형식을 띠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떠오른다. 이러한 사고가 세상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나는 아무래도 한국에 너무 오래 살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