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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r 30. 2020

환상을 위한 찬가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

해가 지면 그 건물은 가로등 빛을 두른 채로 거리에 나선다. 그 건물의 벽에는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돌들이 채워져 있다. 루스티카 양식이다. 1층뿐만 아니라 건물 겉면 전부가 그렇다. 벽돌 무늬 벽지를 두른 것처럼 반듯하게 매무새를 정리한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 그 모습은 무척 이질적이다. 바위가 구르고 깎여 운명처럼 그 자리에 맞물려 쌓인 것처럼 그 건물은 서 있으려 한다. 강렬한 빛과 그림자를 요철마다 새겨놓으려 한다. 그 안을 스쳐 지나간 인간들의 짧은 삶과는 관계없는 낭만적인 세상 속에서 건물은 밤새도록 주홍색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은 자비 없이 땅을 향해 내리 꽂히는 태양빛과 함께 끝나고 만다. 밝은 날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 돌들은 모두 같은 색이다. 한낮의 태양을 이기고 그림자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표면이 거칠지 못하다. 안쓰럽게 모여서는 틈 하나 없이 직각으로 맞물려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사이를 접착제가 평행한 직선을 그으며 지난다. 건물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몹시도 인간적인 구조다. 지독히도 비싼 보스턴의 월세에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수를 곱한 만큼 건물은 자신이 본디 원하고자 했을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가치를 가지고 지어지지조차 못했다.


그럼에도 건물은 꿋꿋이 그 자리에 서 있다. 해 아래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움츠러들 뿐 뒤로 물러서지는 않는다. 뭉툭하게 잘려나가 왕관이 어울리지 않는 머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어느 유럽의 성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열망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훨씬 더 큰 것을 탐하며 청록색 왕관으로 머리를 조인다. 비와 바닷바람을 버티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건물의 집착이 왕관 표면에 녹청이 되어 서린다. 시간의 무게가 뒤통수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아래를 지나는 사람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바다를 밀어내고 이 구역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 이 거리에는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살았다. 이 건물에는 지금 대학원생들이 산다. 건물과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적어도 우리의 환상 속에서는 인간이 아니기를 바란다. 벼락같은 영감을 유리병에 담아 다른 이들에게 조심스레 꺼내어 보여주며, 이것을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말하기를 원한다. 인간의 삶 너머에서 영원히 이어지는 꿈속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써의 처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들을 아득바득 쫓고,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목덜미를 잡힐까 늘 불안해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계속 태어난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에 마음이 부식되어 망가진다. 감당할 수 없는 꿈을 꾸고 달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을, 그리고 이 세상을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은 밤늦게까지 연구실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지쳐 약해진 채로 1번 버스를 타고 찰스 강을 건너 정류장에 내리고 걷다 보면 한창 꿈에 잠겨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낮을 버텨낸 건물은 그 순간만큼은 역사의 한 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고고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건물 너머,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현대 문명의 시기 어린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면 이 모든 괴로움의 끝에 낙원이 있을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적어도 밤이 끝날 때까지는 그 세계에 머물 수 있다. 아침이 되면 그 모든 고통을 잊은 채로 웃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밤마다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기에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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