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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May 11. 2020

'우리'

아무것도 아닌 단어 하나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보며 목놓아 우리나라 파이팅을 외쳤다.

매년 새해가 시작될 때, 보신각 종소리에 눈을 감고 우리 가족의 건강을 기원한다.

연인과 손을 마주 잡고 남산에 자물쇠를 걸며 우리 사랑이 영원하길 소망했다.


일면식조차 없는 여러분과 나를 한 울타리로 넣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나를 한 울타리로 넣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우리라는 단어는 그런 단어다.


우리는 너와 나 두 명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고무줄처럼 늘어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우리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게도 만들어주는 단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라는 단어 안에 내가 포함되면 안도감을 받기도 한다.

반대로 우리라고 표현하는 그 무엇에 속하지 못하면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아니 최대한 우리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그 무엇에 속하고자 한다.


문득 우리라는 단어가 내편과 네 편을 가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어릴 때 나는 우리라는 단어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한 울타리 안에 넣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고 믿었었다.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 걷는 것이라는 동요의 가사처럼...

우리는 힙을 합쳐야 합니다라는 귓가에 스친 무수히 많은 외침처럼...

우리라는 단어가 다른 이들을 한 울타리로 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귀에 들려온 우리라는 단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내편과 남의 편을 가르기 위해, 혹은 그렇게 구분 지어 우리 편이라는 무엇을 만드는 단어로 사용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덧붙인다.


우리 편 할래? 아니면 너는 우리 편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정해.

혹은, 너는 우리랑 다르니까 우리 편 아니야 저리 가.

너무도 씁쓸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사례들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국가들조차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른다.

그뿐만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마저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른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한 명분이 있는 편가름 또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편가름을 지켜보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편을 가르는 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거부터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역사는 반복되었다.

크게는 세계 대전을, 작게는 조선 시대 붕당 정치를 들 수 있다.


언제나 반복되어왔던 편 가르기를 구태어 부족 글로나마 다시 쓰는 것은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기준이 점차 작아지고 편 가르기를 요구하는 형태가 집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편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중간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양쪽으로부터 남의 편으로 취급된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나는 그것이 무섭다.


신념이나 논리에 따라 자신이 속할 우리를 갖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념이나 논리를 갖기 전에 쫓기듯 어느 한쪽을 우리로 선택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해악인처럼 상대 편을 비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우리라는 한없이 늘어날 수 있는 울타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 슬프고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 어린 시절 나에게 우리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점점 무언가를 나누는 것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것이 조금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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