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패왕별희>
그러나 만족스러운 부분만큼 아쉬움도 짙다. 창극 <패왕별희>는 전쟁에서 패했으나 역사에 기록된 항우의 이야기와 패왕과 우희의 비극적 이별 중에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사마천의 ‘사기’와 역사소설 ‘초한지’, 경극 <홍문연>과 <패왕별희>를 2시간여 길이로 엮은 대본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보니 의아함만 남긴 채 막이 내려버렸다. 첫 장면에 잠깐 등장한 뒤 2부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우희가 어떤 심정으로 검무를 춘 뒤 자결을 택하게 되는지, 전쟁 영웅인 항우는 홍문연에서도 갈팡질팡하더니 왜 초나라의 노래만 듣고도 그토록 혼란스러워하는지, <적벽가>도 아닌데 군사들의 설움은 어찌 그렇게 큰 비중으로 그려지는지. 영화나 경극과 달리 창극 <패왕별희>가 오늘의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경극을 품기 위해 창극에서 내어준 것들이 아쉽다. 우리 소리의 본질은 비극성에 있다. 하지만 경극은 기본적으로 희극적 성격을 지닌다. 그 때문에 절절한 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이 등장할 때면 집중력이 흐려졌고, 오롯이 소리를 만끽할 기회는 드물었다. 경극의 색을 빼고 우리 소리로 오롯이 완성한 <패왕별희>였다면 우희와 항우의 이별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창극과 경극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취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쉽다. 캐스팅 역시 그렇다. 우희 역의 김준수는 더할 나위 없이 배역에 어울리는 뛰어난 배우였으나, 경극에서조차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관습이 없어진 지금도 이러한 캐스팅이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창극 <패왕별희>가 보여준 시도는 오늘날 공연예술, 특히 전통예술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다. 협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장르의 외연을 무한하게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립창극단의 전작 <흥보씨>는 판소리 ‘흥보가’의 이야기를 동시대적으로 완전히 뒤틀어 바라보고자 했고, <트로이의 여인들>은 서양 문화권의 이야기를 우리 식으로 재탄생시킨 결과물이었다. <오르페오전>이 음악극으로써 창극이 가 닿을 수 있는 오페라 양식에 대한 실험이었다면,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유실된 우리 소리의 복권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패왕별희>는 창극과 경극을 만나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
공연의 막은 내렸고 무대에 충분한 박수를 보낸 지금, 우리는 이 작품이 남긴 의미를 보다 냉철하게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익숙한 시선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경극과의 접붙여보면서 파악한 창극의 고유한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낼 필요가 있다. 영화 <패왕별희>는 검열이 한창 심하던 1990년대 초 중국 사회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켰고, 뛰어난 예술성으로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영향력을 남긴 작품이다. 2010년대 끝자락에 마주한 창극 <패왕별희>는 우리 예술사에 어떤 기록으로 남을 수 있을까.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 웹진 [공진단] 201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