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로 읽는 예술 에세이
죽음으로부터 삶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며 주어지는 질문에 몸짓으로부터 답을 구하다
발레는 천상의 예술로 그려지곤 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과 현실을 초월하는 감동의 산물. 발레라 불리는 몸짓에는 시대성을 넘어서는 고고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은, 그래서 더욱 귀하다.
『삶의 질문에 몸짓으로 답하다』는 삶을 살아가는 데 주어지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 발레 작품을 들어 몸짓으로부터 답을 구하고자 한 생각을 다룬다. 저자 김태희는 죽음, 사랑, 몸, 환상, 예술, 정치, 우아함까지,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일곱 가지 주제를 두고 열여덟 편의 작품을 골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춤’으로 불리는 몸짓을 쓰고 해석하는 기쁨을 담아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골라냈다. 무대에 선 시절부터 문화예술 잡지를 만들고 평론을 쓰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오롯하게 구축한 ‘글쓰기의 몸짓’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장과 함께 그 매혹적인 순간을 담아낸 사진을 엄선해 무대의 감흥을 전한다.
죽음, 끝이 아닌 탄생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젊은이와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 지젤Giselle
무너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 사랑이란
―오네긴Onegin, 공원Le Parc
무대라는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 몸
―카르멘Carmen, 카멜리아의 여인La Dame aux Camélia, 벨라 피구라Bella Figura
극장이라는 환상, 현실이라는 환멸
―라 실피드La Sylphide, 코펠리아Coppélia, 라 바야데르La Bayadère
움직임은 어떻게 아름다운가
―세레나데Serenade, 상승의 한가운데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 정교함의 짜릿한 전율The Vertiginous Thrill of Exactitude
예술은 또한 정치적이다
―파리의 불꽃Flames of Paris,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우아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 주제와 변주Theme and Variations
작품 찾아보기
도판 출처
마치며 révérence
책 속에서
p.007-008
죽는다는 것은 결코 상황의 종결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모종의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죽기를 결심한 젊은 연인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를 읽어내고, 젊은이와 죽음을 통해 살아가는 가운데 끊임없이 흔들리다 끝내 소멸함으로써 스스로를 해방하는 존재를 발견하며, 낭만성이 가득한 지젤에서 죽음 이후에야 펼쳐지는 사랑의 의미를 마음에 새긴다. 모든 것을 삼켜버린 죽음을, 예술은 기꺼이 건져 올려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p.080
라 실피드에서 우리에게 낭만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건 주인공 실피드의 존재다. 아름다움과 욕망의 화신이자 닿을 수 없어 더욱 애타게 만드는 존재, 순수한 사랑과 자유의 영역이자 시와 예술의 원천이 되는 존재. 우리는 그 환상에 사로잡힌 제임스에게서 낭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현실 세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약혼한 상태이지만, 그 이면에는 어쩌면 결혼이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확실한 감정이 존재한다. 그래서 자신을 홀리게 하는 실피드를 확실하게 손에 넣고 싶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실피드는 교묘하게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제임스는 자신의 현실과 꿈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잠에 취해 있을 때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는 색정적인 환상이 깃들어 있다. 시적 갈망과 환상에 취한 정신 상태의 제임스를 붙잡는 건 다만 에피뿐. 제임스와 실피드·에피의 파드트루아가 끝날 무렵 그의 두 눈을 가리는 에피의 손을 놓치지 말았어야 한다.
p.086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술 작품에 시대와 역사, 국가와 종교를 대입하기보다 이 모든 것이 예술가의 환상에서 비롯한 산물이라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 순간을 만끽하지만 영원히 포착할 수는 없고, 이내 어두운 객석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서서히 사라져 버릴 환상일 뿐이라고. 주변의 빛을 지우고 그러한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일, 그것은 예술을 경험하기로 마음먹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p.101
이렇듯 포사이스는 발레로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를 넘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주목한다. 테크닉을 해체하고 재배열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발레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장르가 내포한 규범과 형식에서 비롯하는 안정감은 깨트리고, 무용수는 그의 작품을 춤추기 위해 스스로 몸을 파편화한다. 발레를 통해 발레를 부정함으로써 발레를 활성화한다. 그간 전승해 온 전통과 문법, 서사와 이미지는 이미 무력해진 지 오래다. 법칙과 관습이 사라진 곳에서 새로운 움직임과 이미지가 태어난다.
저자 소개
김태희
무용평론가. 편집자.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무용이론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마쳤다. 2008년 베를린 탄츠올림프에서 클래식/네오클래식 부문 은상을 받았고, 고등학교 무대에서 ‘불새’를 춤추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글을 쓰기 시작해 월간객석에서 인턴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SPAF 젊은 비평가상으로 등단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으로 ‘극장과 춤, 동시대를 움직이는 전략들: 해외 주요 무용단체 17/18 시즌 경향 보고서’(2019)를 냈다.
2018년부터 디자인이끼에서 사람과 사람, 텍스트와 디자인을 잇고 있다. 경기아트센터·국립국악원·국립극장·국립현대미술관·서울문화재단·세종문화회관의 잡지를 만들었고, 국립극단·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문화예술 기관과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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