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가가일 May 03. 2023

내 속도대로 하면 회사가 참아줄까?

독일대기업 정규직 2년 차의 반년 시한부 50% 파트타임, 그 첫날

지난주 팀장과의 면담 후 (눈물이 터져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전화를 드렸다) 반년간의 단축근무 결정이 정말 독일답지 않게 엄청 빠른 속도로 HR과도 협의가 됐고 바로 강제휴가를 당했다.


연차는 총 30일인데 4월 말까지 내가 쓴 휴가는 8일. 5월부터 10월까지 반년간만 한시적으로 파트타임을 하는 것인데도 인사시스템 상으로는 4월 말까지의 내 연차의 의무사용일인 10일 중 잔여연차인 이틀이 이월이 안된다고 한다. 4월의 마지막 평일은 금요일, 나는 그 소식을 수요일에 들었다. 부랴부랴 팀장과 상의 후 목금 휴가를 내기로 하고 그렇게 얼떨떨하게 반년 간의 50프로 시한부 파트타임도 신청서류 한 장에 싸인 한 번 하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나는 강제 휴가를 당했다.


5월 1일은 독일도 노동절 (Tag der Arbeit)이라 공휴일이다. 덕분에 목금토일월 5일을 쉬게 되었다.


딱 하루에 하나씩 목표를 정했고 실행했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나의 경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무기력함은 날씨가 좋으면 그래도 조금 나아지는데 (독일은 해가 너무 귀하니까 해 뜨면 저절로 기분이 좀 나아지고 그 해를 최대한 받기 위해 일단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진다.) 다행히 노동절 연휴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루에 하나씩만 성취감을 느끼면 일로부터 자신감이 떨어지고 지쳐서 생긴 내 우울증이 나아질까 싶어 열심히 실천했다.


목표를 세우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래도 내 상태가 지난주 아니 며칠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구나 싶었다. 나는 상담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에 따르면 정말 모범 우울증 환자(?)에 속하는데 약 복용도 상담예약도 칼 같이 지킨다. 내 우울증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너무 잘 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기에 나는 이 우울증에서 너무도 벗어나고 싶다...

 

목요일은 미루고 미루던 휴대폰 계약을 변경하고, 금요일은 남편과 운전연습을 했고, 토요일은 친구와 발코니 페인트 칠을 마저 했고, 일요일에는 남편 친구부부네 가든파티에 다녀왔고, 월요일에는 독일 다른 도시에 사는 친한 동생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모두... 쉽지 않았다. 평소의 곱절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소요됐고 중간중간 따로 혼자서 휴식도 많이 취해야 했으며 예전보다 짧은 시간만 계획하고 해냈다. 발코니 페인트칠을 도와준 친구와 우리 집에 기차까지 타고 놀러 온 친한 친구 두 명에게는 내 상태를 미리 전하고 양해를 구했다. 나를 보러 고맙게도 와주는데 내가 예전처럼 충분한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할 테니 먼 길 오는 것 다시 한번 고려해 보고 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고. 다만 와주면 정말 너무 고맙겠다고... 다행히 두 친구 모두 나를 너무 아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라 나를 이해해 주었고 덕분에 나는 많이 힘들지 않게 친구들과 편안하게 내 속도대로 내 에너지만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내게 에너지를 도로 채워주었던 것 같다.


나름 바빴지만 사람들과 교류했던 지난 5일이 지나고 나는 오늘 첫 출근 아닌 첫 출근을 했다.


반년 시한부 50% 파트타임이 시작되는 첫날.


나는 2022년 3월에 현직장에 입사를 했는데 이 회사가 인턴포함 다섯 번째 회사이고 내 스펙상 갈 수 있는 최고의 회사라고 생각했다. 7번의 면접을 거쳐 반년만에 합격 통보를 받고 정말 어렵게 들어간 독일대기업...


그 회사에서의 2년 차가 된 지 딱 두 달 만에 나는 임신도 아닌데 전례 없이 자발적 파트타임을 그것도 학업병행의 이유로 꽤 흔한 80프로도 60프로도 아닌 50프로를 하게 된 특이한 직원이 되었다.


안 그래도 독일스러우며 외국인 비율이 10프로도 안 되는 이 보수적인 회사에서 나는 우리부서 40명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라 가만히 있어도 튀는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이 한시적 단축근무로 참... 별난 사람이 되었다. 팀장포함 가까운 동료 세명과 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개인적 사유로 인한 결정이라고 둘러댔다.


지난 5일간 내 몸과 마음이 충전되었던 탓일까. 나는 오늘 출근길에 놀랍게도 울지 않았다.

지지난 주에 출근했던 이틀 모두 길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울며 비상안정제를 먹어야만 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크고 큰 변화이다.


일은 예전과 같은 속도가 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심호흡을 하며 내 속도대로 처리했고 내가 계획했던 단 하나의 중요 업무와 자잘한 스팟성 업무 두세 개를 해치우고 한시에 퇴근했다.


뿌듯했다.


평소에 꽤 괜찮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를 위해서 돈을 쓰는 경우는 잘 없었는데 (저축계획을 꽤 타이트하게 짰고 일 년간 지켜왔다. 그렇다 나는 스스로에게 꽤 팍팍한 인간이다...) 오늘 울지 않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동료들과 마냥 밝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야기도 나름 했고 그렇게 퇴근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어제 친한 동생과 처음 시도해 봤던 역 근처의 Bowl 음식점이 생각났다. 김치가 김치가 아닌데 맛있었던 그곳에서 나를 위해 정말 오랜만에 음식을 샀고 집에 와서 천천히 맛있게 먹었다. 나를 늘 몰아붙여서 생긴 우울증이기에 요즘 되도록 나에게 친절해지려고 노력 중이고 그 일환이라 생각하며 맛있는 포도주스 음료도 만들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술은 절대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고 꽤 잘 지켜오고 있다. 아무리 내가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커서 우울증에 걸렸다지만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기에 술에 취했을 때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나도 장담하지 못하고 지난 경험을 비추었을 때 우울증이 심할 때 마셨던 술은 내게 늘 독으로 작용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후 시간을 시간부자처럼 느긋하게 보낸 후 퇴근한 남편과 함께 30분 조깅까지 해냈다. (우울증 환자 맞아?)


체력이 너무 별로인 나는 몇 주 전부터 상담선생님의 적극적인 추천에 달리기를 주 2-3회 시도해 보고 있다. 처음에는 3분 뛰고 2분 걷고, 그리고 3분 30초 뛰고 1분 30초 걷고, 4분 뛰고 1분 걷다가 지난번에는 20분을 한 번에 오늘은 신기하게도 30분 거리 (3.5km)를 쉬지 않고 뛰어냈다. 이 것이 가능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보폭을 좁게 하고 아주 천천히 뛰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힘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보폭을 조금 더 좁게 하고 속도를 의도적으로 낮추면서 호흡에 신경 썼다.


나를 앞질러 가는 다른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에는 거북이 속도인 내가 창피했지만 옆에서 함께 천천히 뛰어주는 남편의 응원과 내 호흡에만 집중한 덕에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든 생각.


내 속도대로 조금씩 천천히 하니까 못할 것 같은 30분 조깅도 해냈네? 지금 내 일도 우울증 때문에 50%를 그것도 아주 느린 속도로 해 내고 있지만 조금씩 작은 목표를 세워서 천천히 "내 속도"대로 해내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체력이 쌓이면 결국 달리기의 속도를 높이고 거리를 늘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처럼... 50% 파트타임의 마지막 6개월 차가 지나고 나면 다시 예전의 나처럼 100%를 해내면서 독일에서의 회사생활을 자신감 잃지 않으며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근데... 그걸 회사가 참아줄까?

내일 팀장과 출근하자마자 한 시간 커피타임이 잡혀있다. 이유는 내가 지난주 마지막 통화에서 "지금 내 능력은 안타깝게도 예전의 내 능력이 아니며 쳐낼 수 있고 내가 이미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적응된 업무가 아닌 다른 모든 새로운 업무, 특히 개발업무는 당분간은 힘들다. 업무량뿐만 아니라 업무분장과 다음 6개월간의 팀 목표 조정이 필요하다."라고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주어진 업무를 모두 해 낼 수 없다"라고 인정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회사는 그리고 팀은 목표와 성과에 따라 움직인다. 올해 그리고 상반기 팀의 목표는 이미 정해졌고 내가 해내지 않으면 이미 다른 목표가 풀로 설정된 내 동료가 그 업무를 떠 안거나 아니면 윗선에 이미 보고완료한 프로젝트 몇 개가 그냥 무산되거나 하반기 또는 다음 해로 밀리는 것이다. 현재 인사팀과 협의하고 이미 계약서를 작성한 내 50% 시한부 파트타임은 10월 말까지. 지난주의 내 의견에 함께 생각해 보자던 팀장은 아마 내 의견을 받아주면 팀의 올해 목표 열 개 중 두세 개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내일 한다. 과연 회사가 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의 속도를 받아줄까? 받아준다 한들 개인의 우울증 회복을 위해 회사가 개인사정을 얼마나 오래 참아줄까?

  

작가의 이전글 입원?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