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목 Nov 26. 2020

훼손의 추억

 생장을 위해서는 훼손이 필요하다. 어머니의 자궁 막을 찢고 태어나는 순간, 또는 더 거슬러 올라가 태고부터 무언가에 기생충처럼 진득하게 들러붙곤 하는 모든 생명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일곱 살 무렵 아랫니 하나가 흔들렸다. 영구치와 유치를 구분 못 했던 시절, 내 이는 마냥 단단하다고 믿었다. 딱딱한 견과류를 호두까기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씹었고, 차가운 아이스크림도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그랬던 유치가 부드러운 모가 훑고 가는 짧은 양치질의 순간에도 위태롭게 덜렁거리는 것을 보며 막연한 공포에 휩싸였다.


 부모님은 나를 보며 이제 곧 이를 빼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이를 잃는 게 두려웠다. 어금니 밖에 없던 황무지 같은 입 속에 결연하게 뿌리내린 선인장 같은 이를 보며 흐뭇해했을 부모님의 모습이 상상됐다. 왜 이를 뽑아야 하지? 나는 치과를 거부했고, 부모님은 내 단단한 고집에 설득을 포기했다. 어차피 곧 빠질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나는 아랫니의 신경들이 한 줄씩 끊기는 것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괴롭게 보냈다. 그리고 대롱대롱 절벽에 매달린 듯 아슬하게 붙어 있던 그것은 어느 순간 뚝 하고 끊기고 말았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여린 압 안을 긁는 감각이 느껴졌다. 먹던 것을 내려놓고 입 안을 살폈다. 이상한 게 섞여 있었다. 다급하게 뱉어낸 음식물 속에 약간의 피와 하얀 돌 같은 덩어리가 있었다. 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리를 커다란 허무함이 대체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지켰던 것이 결국 스러져 버린 것이다. 나는 손을 흐르는 물에 씻어 내고 휴지에 싸서 이를 버렸다. 내가 자라기 위해서는,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상실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고한 일이었다.


 그 뒤로 나는 이가 흔들릴 때마다 주저 없이 뽑았다. 치과에서도 울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발치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이상한 애어른이 되어 버렸다. 소중한 것을 만들기 싫어졌다. 내가 잃어야 했던 유치처럼 소중히 품은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추억을 나눴던 친구는 저 멀리 유학을 떠났고, 좋아했던 선생님은 학년이 바뀌자 연기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상실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차피 잃어야 하는 것이라면 마음을 주는 것이 무서워졌다.


 자연스럽게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계가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를 핑계로 친구들과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고, 대학에 와서는 동기일 뿐이라는 틈을 생각하며 정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은 항상 서늘하고 공허했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락해도 까닭 모를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 모순적인 감정을 마비시키고 싶었다. 외로움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고 싶었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일은 항상 일어났다. 감정은 불쑥불쑥 치솟아 나를 휘둘렀고, 사랑 또한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상실에 면역력이 없었던 나는 내가 망친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홀로 남겨져 속수무책으로 아프기만 했다. 마음 한 편에 생긴 작은 공간 하나도 나를 충분히 힘들게 했다. 이 작은 공간들이 모이면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산산조각 나 무너질 것 같았다.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항상 무섭고 괴로웠다.


 문득 나를 괴롭히는 감정에 의문이 들었다. 이 아픔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루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절망했던 꿈들이, 미리 선을 긋고 외면했던 사람들이 나를 아프게 만들었던가? 아니었다. 차라리 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고 감정을 쏟아내고 힘들어했어야 했다.


 내게 있어 상실은 원석이 되었다. 상처로 마음을 파헤치고, 새로운 것으로 뒤덮어야 어떤 것을 다시 싹 틔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모든 성장은 크고 작은 훼손과 회복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 작은 진리를 알 때까지 나는 그저 홀로 아프기만 했다. 다음의 인연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성장할 나를 예상도 못하고. 


 7년을 기다려 겨우 며칠간 성체로 사는 매미의 삶 같이 어른이 마냥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성장의 끝은 결국 마지막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이라도 내가 한 틈 성장한 사람이 된다면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이제야 뒤늦은 성장통을 즐겨 보기로 했다. 이것은 내게 주어진 즐거운 숙제가 될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