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피를 아시나요?
준비물
통계피 150g
생강 150g
대추 15~20알
물 4L
설탕 300g (나는 좀 더 향을 더하고 싶어 흑설탕을 썼다)
만드는 법
1. 대추는 흐르는 물에 씻고 식초물에 담가 놓는다.
2. 생강은 껍질을 벗겨주고 얇게 썰어둔다.
3. 썰어둔 생강을 물 2L에 넣고 끓인다.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중약불에 30분 끓인다.
4. 계피는 솔로 박박 씻어낸 뒤 물 2L에 먼저 10분 이상 담가놓는다.
5. 대추와 계피를 물 2L와 함께 15분 정도 끓여준다.
6. 생강물, 대추+계피물을 면포에 걸러 큰 냄비에서 합쳐준다.
7. 설탕 300g을 넣고 10분 정도 팔팔 끓여준다.
8. 식혀서 냉장 보관한다.
9. 곶감, 잣 등 원하는 고명을 띄워 마신다.
이 사건은 아직은 재료에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참 샹그리아며, 뱅쇼며 서양식 음료 제조에 재미가 들린 시절이었다. 뱅쇼 끓인다고 팔각이며 정향이며 듣도 보도 못한 재료들을 마구 사들여 틈 날 때 따끈하게 끓여먹곤 했었는데, 그때 당시 집에 가지고 있던 작은 시나몬 스틱을 모두 소진하고 만 것이었다. 근데 뱅쇼에 정향, 팔각은 없어도 시나몬은 있어야 하는 법.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 보이는 대로 주문해 두었는데.... 며칠 뒤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린 택배는 내가 생각한 그것은 아니었다.
어.... 저는 이런 사이즈의 물건을 시킨 적이 없는데요.
그때 알았다. 계피와 시나몬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어 그러니까 계피가 영어로 하면 시나몬이긴 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두 개의 그것은 품종이 다르다는 것을. 카페에 가서 주문을 할 때 계피 빼고 시나몬 주세요! 라는 말은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계피는, 통계피는...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둘이 친척이긴 한데 그러니까, 고양이와 호랑이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뱅쇼를 끓여도 한 50번은 끓일 수 있을만한, 내 종아리만큼 길고 등산스틱으로 써도 될 만큼 단단한 통 계피의 위엄 앞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커다래서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 막 영험한 기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가족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먼 산골에서 겨우 찾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나의 상체 근육으로는 그것을 해체하기조차 어려워서 단단한 곳에 강하게 두드려 박살을 내는 방식으로 소분해야 했고 (옆집 미안합니다) 그리고 도대체 소분해서 뭘 한단 말인가, 나의 수납장에 계피만 가득 차 버리는 것을... 소분은 '조금씩 꺼내 쓰기 편하도록' 행하는 작업이거늘, 이렇게 조금씩 꺼내 쓰면 도대체 언제까지 쓴단 말인가. 그래서 어쨌든 계획했던 뱅쇼를 조금 끓여먹고 난 뒤 (사실 뱅쇼를 끓이기에 계피는 맛이 좀 강하고 투박하다) 계피가 벌레 퇴치에 좋다는 것을 알아내고 집안 곳곳에 통계피인 채로 비치해두었다. 보통은 계피 물을 우려 뿌리던데, 계피가 색깔이 있어서 벽이나 가구에 착색될 것 같기도 하고, 뭐... 물에 우리는 건 계피가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적은 계피로 많은 효율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데요? 때 아닌 계피 flex. 솔직히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괴상한 해충은 집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계피 신이 저를 도우사. 약간 집안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든 나무 같기도 한 것이.
아무튼 그렇게 각종 방식으로 계피를 소비하고도 남은 것들이 집안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발굴되었다. 더 이상 이것을 spiritual한 이유로 모셔두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계피를 가장 확실하게 소비할 수 있는 한국인의 소울 드링크, 수정과를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뱅쇼가 별거냐, 정향, 팔각이 별거냐... 그렇게 재료를 시시하게 소비하고 나머지는 와인의 깊은 맛과 과일의 향긋함에 의지하는 그런 비열함은 우리에겐 있을 수 없다. 생강과 계피와 대추를 산처럼 쌓아놓고 그냥 막 끓이는 거다. 다른 재료나 복잡한 과정 없이 상당히 직선적인 음료라고 생각했다. 항상 같이 붙는 짝꿍으로 식혜가 있는데, 솔직히 제조 과정과 난이도는 완전히 천지 차이. 솔직히 그 둘 중엔 꼭 식혜를 고르는 사람이긴 한데.... 원래 집 요리라는 건 먹고 싶은 것보단 집에 있는 재료를 소진하는 것을 우선하는 법이지! 엿기름가루 같은 게 집에 있겠냐고용...
집에 소위 말하는 '들통', 엄청나게 큰 곰국 냄비 같은 것이 없어서 각종 냄비를 늘어놓고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집안 가득 퍼지는 생강과 계피, 대추의 냄새가 향긋했다. 계절이 바뀌는 중에, 꽃샘추위를 녹여주는 따뜻한 성질의 냄새들. 처음 끓이고 난 저녁 따끈하게 한 잔 했을 때는 땀이 배어날 만큼 온몸과 뱃속이 묵직하게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또 한 김 식혀 다음날 햇살 비치는 시간에 차갑게 마셔보니 스파이시한 맛이 깔끔해서 또 이런 상쾌한 여름 음료가 어디 있나 싶기도 한 것이, 어쩌다 생각난 그 통계피가 이런 간절기에 내 손에 잡힌 이유가 있으려나. 역시 섬세하고 배려 깊은 나의 가신(家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