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링!’
여자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휴대폰의 액정화면을 바라봤다. 남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벌써 전에 도착한 메시지들이 함께 주르륵 화면을 가득 채웠다. 휴대폰 화면은 이내 암흑으로 바뀌었다. 여자는 버튼을 눌러 메시지 하나를 클릭했다.
‘아침은 먹었어? 난 이제 먹으려고.’
‘주말인데 데이트도 못하고 있네 우리.’
‘뭐해?’
‘바쁜가 보다. 시간 되면 연락 줘.’
여자는 휴대폰의 불빛이 번쩍거리고 그것이 그가 나에게 보내는 일상의 물음 혹은 안부의 내용임을 확인할 때마다 얕은 안도감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여자는 메시지 몇 줄 작성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허리가 뻐근해져 올 만큼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남자의 메시지‘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 외출을 마음먹었을 때부터 여자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남자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여자는 언제나 주말의 일정을 비워두었다. 들쑥거림이 심한 그의 일 탓에 어렵게 생기는 ‘우리의 시간’이 어긋남을 꽤 자주 경험한 후 여자가 혼자 세워둔 대책 비슷한 거였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하기 위해 비워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몇 달 전부터 혼자 꾸역꾸역 채워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만나야 할 사람은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전시회를 가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일어나 평소보다 조금 더 공들인 화장을 하고, 옷장에서 가장 최근에 구입한 옷을 꺼내 입었다. 제법 두툼한 책 한 권과 노트, 그리고 휴대폰의 여분 배터리도 잊지 앉았다.
토요일 아침의 광화문 카페는 한산했다. 여자는 커피 한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잠시 고민하더니 카페의 가장 안쪽 자리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휴.
여자는 김이 오르는 커피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의 기운이 여자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어젯밤부터 아득하게 까만 휴대폰 액정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휴대폰 액정에 여자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췄다.
남자에게선 어젯밤부터 사소한 안부를 묻는 인사조차 없었다. 여자는 얼마 전 우연히 남자의 노트북에서 남자가 누군가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남자의 노트북이었으므로 발신자는 분명한 남자, 여자의 남자 친구였다.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노트북 안에서의 남자는 사소하게 궁금해했고, 일상에 쫓기며 지내는 바쁜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는 알게 된 사실을 남자에게 확인하지 않았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만, 여자가 누군가의 관계에 끼어든 사람일 수도 있겠단 막연한 공포 같은 것이 느껴져서였다.
그때부터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권유형의 어투를 쓰지 않았다.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거절의 말이 익숙해질 때쯤 알게 된 남자의 다른 모습에 여자의 막연한 공포는 확실함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날 이후 여자에게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어쩐지 밥을 먹지 않아도 크게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며칠을 내리 까만 밤의 모든 소리와 공기를 견뎌내는 날이 이어지다가, 또 꿈에서 깨어날 수 없는 날들이 연속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의 기분에 맞추어 언제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듯 여자의 모습으로 다가갈 땐 멀리 있던 사람이었다. 여자의 변화를 느낀 남자는 여자를 사소하게 궁금해했고, 다정하게 걱정했다. 여자는 종종 지금 위치를 남자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면 남자는 종종 여자가 있는 곳에 감쪽같이 나타났다. 오늘도 나타날 거야?라는 물음이 드는 순간 여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상적이지 않아.
오늘 아침 여자는 결심했던 터였다. 정상적이지 않은, 서로의 마음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시간을 끝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간 여자는 스스로의 설득에 수긍하는 듯하다 눈 감아버리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뜨거운 김이 식어 일회용 커피 잔 안으로 촘촘히 물방울이 맺혔다. 커피 잔을 드는 앙상한 여자의 손가락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틀림없어야 해.
‘띠리링!’
‘바쁜가 보다. 시간 되면 연락 줘.’
틀림없어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피어오르는 얕은 안도에 여자는 작은 몸서리를 쳤다. 틀림없으려면 오늘 이 카페를 오면 안 될 일이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여자가 이곳에 있는 것을 남자가 알고 있다는 것을. 여느 때처럼 사소하게 궁금해하고 다정하게 걱정하면서 감쪽같이 나타날 거라는 걸.
‘왜 또 커피만 마시고 있어. 빵이랑 같이 먹어.’
여자 앞에 또, 감쪽같이 나타난 남자의 손엔 어느새 카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베이글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여자는 펼쳐져 있던 책을 덮고 모른 척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살짝 넘겼다.
이번엔 틀림없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