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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Aug 27. 2019

인턴 일기

평소와 같은 날(1)


아침 5시 50분, 맨얼굴에 로션만 겨우 바른 채 푸석한 얼굴로 병동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는 것부터 무엇하나 다를 게 없는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드레싱 장부에 붙어있는 열 개가량의 T can 소독, 그중의 일부는 하루 세 번씩 하라는 세부 지시가 있음을 눈으로 쓱 한번 확인하고, 아침 6시 30분 이전에 반드시 해달라는 동맥혈 검사가 7-8건 정도, 그리고 오전 8시까지는 해달라는 검사가 또 십 수건 있었다. 나와 페어를 이루는 다른 인턴이 또 옆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을 테니, 응급 콜만 오지 않으면 오늘도 아슬하게 일을 해나갈 수는 있을 것이었다.


인턴 3개월 차, 혹독한 훈련의 결과인지 이제는 어지간하면 실패 없는 동맥혈 검사 바코드를 들고 능숙하게 병실로 간다. 병동 내에 Sub ICU라고 불리는 집중관찰실에 누워계신 여섯 분의 동맥혈 검사를 한다. 중증도가 높은 분들은 채혈도 쉽지가 않다. 오래 누워있고 식이가 원활치 않으니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혈관들이 잘 터지고, 많은 혈압 조절 약물들이 들어갔거나 항암제가 들어갔거나, 정맥로를 오래 가지고 있었던 분들은 채혈도 잘 안된다. 


아침 채혈을 마치고 드레싱을 하러 병실을 돌기 시작한다. 드레싱이란 게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식사 중이거나, 오전에 검사를 가서 부재중이면 다시 갈 짬이 여간해선 잘 나지 않기에, 자리에 모두 계셨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며 출발. 병동도 2주 차쯤 되니 입원 오래 하신 분들은 나의 패턴에 또 잘 맞추어 주신다.  완벽히 한 병실 드레싱을 끝내고 업무 일지에서 지워나갈 때의 그 뿌듯함이란-


그렇게 급한 아침 업무를 마치고 나면, 교수님의 아침 회진 후에 폭풍같이 쏟아질 추가 오더가 발생하기 전까지 약간의 짬이 난다. 이 약간의 짬이란 말 그대로 병동 간호사들과 안부 한마디 섞을 수 있고 환자 분들이 뭘 물어보면 조금이라도 고민하여 대답 한두 마디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여유인데, 이 시간쯤 되면 '아 아침에 나 화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내일부터는 마음의 여유를 좀 가져야지'라고 다짐한다. 어제도 그랬듯이. 하지만 오늘도 밤늦게 퇴근하고 아침 6시가 되기 전 후닥닥 출근하여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겠지-? 불친절한 의사는 용서가 돼도 제때 일을 못하는 것은 안되니까 하며 위로를 하는 것 까지가 내 마음의 사치였다.


다인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CT촬영 동의서를 받는다. 이제는 거의 외워버린 동의서를 환자 책상에 올려놓고 같이 걸터앉아 줄줄 읊는다. 그런데 아무리 여러 번 해 본 검사지만 설명에 너무 관심이 없으시다. 기껏 설명하고 있는데 나 참, 이런 사람들이 꼭 서명할 때 되면 못 들었다고 한다니까. 지금 콜은 계속 오고 해 달라는 일은 실시간으로 쌓이고 있는데 집중 좀 해주지. 


"환자분, 몇 번 해본 검사이신가 봐요 그래도 설명 잘 듣고 서명도 하셔야 되는데, 다시 해드릴 테니 이쪽 보세요."

"아니 선생님 저거 봐요."

그제야 동의서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니 방에 있는 환자들 모두가 TV를 보고 있다.


"이게 웬일이래.. 배가 가라앉았나 봐?"

"배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다 죽은 거야? 큰 배야?" 

"다른 채널에서는 다 구조됐다는데?"

잠시 나도 멍하니 뉴스를 쳐다보다가 어느새 검사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환자분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나와 다음 병실로 향한다. CPCR 코드블루 123 병동, 호흡기내과, 내가 서브로 담당하고 있는 옆 병동에 심정지 환자 발생 방송이 나옴과 동시에 방향을 돌려 뛴다. 다른 병동에서 걸려온  콜로 내 폰은 터져나가라 울려댄다. 


다들 구조되겠지. 

나는 지금의 일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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