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쇼핑도 좋아하고 옷도 좋아하는데 반해 우리 엄마는 옷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 사람마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관심도, 돈도 투자한다. 먹거리를 중요시하는 엄마는 어릴 적 좋은 것들을 열심히 해 먹이셨지만, 옷을 사 주시는 일은 드물었다. 새 옷을 사던 기억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기억될 만큼 어릴 적에 옷을 사는 일은 특별한 일이었다. 한이 되어 내가 지금 이렇게 옷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올해 2~3주에 한 번씩 엄마와 나들이를 가는데, 매번의 나들이에 엄마는 똑같은 옷을 입고 오셨다. 계절이 바뀌는데도 외투가 바뀔 뿐 늘 입고 다니시는 줄무늬 후드티는 바뀌지 않았다. 외투도 입고 나오시는 옷은 겨울에 한 벌, 봄에 한 벌이 전부다. 아빠가 엄마한테 옷 좀 사 입으라고 잔소리를 하시는 이유를 알겠다. 대단한 우리 엄마.
그렇다고 엄마가 옷이 없으시거나, 옷 살 돈이 없으신 것도 아니다. 누가 옷을 선물한다고 그냥 입으시지도 않으신다. 옷에 관심이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우시다. 엄마 마음에 드는 옷을 만나기 힘들고, 한 번 찾은 마음에 드는 옷을 마르고 닳도록 입으신다.
엄마가 편하게 입으실 옷 몇 벌을 사드릴 생각으로 서문시장에서 만나기로 엄마와 약속을 했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괜찮은 것들이 있을지 먼저 둘러보고 찜해두었다. 베이지색 니트, 연분홍의 마남방 등..
엄마는 역시 오늘도 엄마의 최애 후드티를 입고 나오셨다. 이쯤 되면 주커버그도 울고 갈 정도다. 엄마에게 오늘은 옷 몇 개 사자고 했더니 예상했던 것처럼 시큰둥하시다. " 야, 내가 안 입어서 그렇지 옷 많아." 엄마 옷을 구경하러 다니는데 옷은 열심히 보지도 않으시고 엄마의 주 무기인 수다를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하신다. 내가 미리 봐 둔 옷도 단박에 거절하신다. 나는 저런 거 싫어.
배낭을 늘 매고 다니시니 라운드티는 가방 끈이 목에 닿아서 싫으시단다. 나이 70대가 입으실 얇은 후드티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 내가 아무리 이것저것 권해봐도 고개를 흔드신다. 베이지색 계열은 속옷 같다고 하시고 연분홍도 튀어서 싫으시단다. 그러면 남색과 검은색 밖에 남지 않는다. 소재도 길이도 품도 까다로운 엄마의 기준에 합격할 수가 없다. 나 쇼핑 좋아하는데 엄마랑 쇼핑하는 거 진정 힘들다.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엄마 마음에 드는 옷을 오늘 안에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후회가 밀려온다. 70이 된 엄마가 좋아하는 옷 실컷 입으시겠다는데 내가 왜 간섭을 한 건가? 그것도 엄마 자유인데 말이다. 엄마가 일 년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 곳곳을 누비는 것을 보는 사람은 어차피 나 하나뿐인데. 무슨 상관이 있나 말이다. 괜히 쇼핑 나와서 엄마 까다롭다고 잔소리나 하고.
엄마 동네 분이 어느 백화점에서 2만 원 주고 사셨다는 블라우스가 괜찮더라 하시길래, 나온 김에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 매장을 찾아가 똑같은 옷을 찾았는데, 2만 원을 주고 사셨다던 옷에는 189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ㅋㅋㅋ 이게 마음에 드시면 큰맘 먹고 이거라도 사드릴까 했지만, 마음에 드시면 맨날 입고 다니실 텐데 동네 사람과 똑같은 옷을 사기도 마음 편치 않다. 그리고 엄마는 "야, 2만 원이면 괜찮다 생각했지. 뭘 저걸 19만 원이나 주고 사냐." 하신다. 내 눈에는 촌스러워 보여 더 권하지도 않았다.
다른 매장을 여러 군데 더 돌아봤지만 예상대로 엄마 맘에 드는 옷은 없고, 나도 지쳤다. 그냥 포기하고 오늘의 쇼핑은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돌아 나오는데 옷걸이에 걸린 니트 하나가 괜찮다 싶어 엄마에게 한 번 더 권했다. 웬일로 조금은 마음을 보이신다. 지친 딸에게 미안해서 그러셨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오늘 50프로 세일이라 옷도 반값이 되고 나니 엄마도 생각을 좀 더 하시는 눈치다. 재빨리 근처에서 다른 니트도 골라 2개 사자고 엄마를 졸랐다. 여기서 니트 하나 사 봤자 여름 내내 또 하나만 입고 다니실 테니, 엄마의 단벌 신사 탈피가 목적인 나는 최소한 2개는 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를 설득할 재간이 없다. 그래도 하루 종일 돌아다녀 니트 하나라도 산 게 어딘가.
아들 녀석이 어릴 적에 마음에 드는 옷 하나만 주구장창 입고 다녀서, 아이를 데려가 스스로 2개를 고르게 하고 한 번에 2개를 사 온 적이 있었다. 그렇게 2개를 골라와도 그중 더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그렇게 입고 다녔었다. 이 녀석이 외할머니를 닮았던 거였구만.
하나라도 건졌으니 그나마 오늘 하루가 뿌듯하다. 이제 엄마 옷 입으시는데 잔소리 안 해야지. 엄마 하시고 싶은 대로 하셔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