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장소는 기억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억이 되살아난다. 잊혀진 것 같았던 기억이 미꾸라지처럼 마음을 헤집는다. 어제 일처럼 마음이 출렁거린다.
오늘 나는 그곳에 다녀왔다. 벌써 여러 번 갔던 곳.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이 있던 이후로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과거의 그 일과는 다른 이유로 그곳에 갔지만 나는 전날부터 무거웠다. 그곳을 나서고 나서고 한참을 무거워했다.
버스를 타고 그 동네를 벗어난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바보같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역시나 그 장소에서의 기억, 그 때문이었다. 그 공간은 나를 그날로 데려갔다. 묻고 싶었던 그날의 나의 감정을 비웃듯 파헤쳐냈다.
그래도 장소는 기억한다. 기억해야만 하는 일들을 기억하게 한다. 그날의 기억은 그날의 나를 소환한다.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을 소환한다. 그 날의 나는 참 애썼다. 그 날의 나의 사람들은 참으로 든든했다. 그 날의 하늘은 참 맑았고 해는 눈부셨다.
기억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다 기억으로 감사했다. 아주 잊어버리진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기 싫지만 또 약간은 기억해도 좋겠다 싶었다.
다음번 그 장소에 갈 때는 오늘보다 조금 덜 무거웠으면 좋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될까. 새롭게 쌓인 일들이 그 기억의 층을 저 아래로 덮어 버리는 날이 올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을 해내려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야만 할 그날이 올까.
장소는 기억한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떠오르게 한다. 잊은줄로만 알았던 그날의 온도, 그 날의 냄새, 그 날의 생기도 함께. 그래도 좋은 기억을 담은 장소들이 많이 떠오른다는건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