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 필수!!!
오늘은 비장하게 세신(洗身, 몸에 붙어 있는 때를 밂)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세신을 처음 하면 했지 도전이라니. 따지고 보면 도전자는 세신을 한번도 받아보지 않은 나의 몸을 세신하는 세신 이모님이신데 말이다. 그래도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첫 시도이니 나름 도전이라 이름을 붙였다.
처음 무언가에 도전할 때 선택지는 두가지다. 처음인 티를 팍팍 내며 솔직하고 겸손하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임할 것인가 아니면 아는척 할 것인가. 아는척 하려면 빈틈없는 사전조사가 필요하다. 세신을 주기적으로 받는 지인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어 묻는다던가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을 샅샅이 뒤져볼 수 있다. 잠깐의 고민 후, 괜히 아는 척 했다 민망한 상태로 망신을 당할 수 있으니 솔직하게 임하기로 했다.
세신은 안에서 결제하면 되나요? 계좌이체도 되나요? 목욕비를 계산하며 물었다. 안에서 결제하면 되고 이만 오천원, 계좌이체도 된단다. 어제 동네 목욕탕을 검색하다 알게된 1인 세신샵은 무려 육만원이던데. 왠지 성지를 찾은 기분이다.
드디어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몇 년만에 느끼는 뜨거운 습기에 눈이 풀렸다. 다시 눈에 힘을 주고 미션 수행을 위해 세신 이모님을 찾아갔다. 세신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상단에 펀치 구멍이 뚫린 투명한 지퍼백에 현금과 내 번호가 적힌 영수증을 넣으라고 하셨다. 계좌이체는요? 휴대폰을 가지고 오란다. 넵 하고 달려나가 휴대폰을 가져왔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
계좌이체 후 구멍이 뚫린 지퍼백에 영수증을 넣어 대기줄에 걸었다. 내 번호를 언제 부를지 모르니 빨리 준비해야지. 부랴부랴 십분만에 샤워를 마치고 온탕으로 들어갔다. 십분이 흘렀다.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며 이십분을 더 버텼다. 나는 온탕에 오래 있지 못하는 체질이라 도저히 세신이고 뭐고 지치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이모님께 순서를 물어봤다. 한 사람이 더 남았다고 하신다. 그때 마침 주위를 둘러보니 찜질방에서 먹었던 플라스틱 식혜통들이 보인다. 이거다!
대충 물기를 닦고 탈의실로 나가 음료를 주문했다. 캔음료, 그리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감식초와 커피가 보였다. 식혜는 없나요? 당이 필요했다. 이모님은 먹고싶은건 먹어야지 하시며 한층 위 찜질방으로 올라가 식혜를 공수해주셨다. 나의 생명의 은인.
식혜를 받자마자 반통을 순삭했다. 거짓말같이 머리가 깨끗이 개었다. 그제서야 목욕탕 안의 사람들이 저마다 마실 음료들을 옆에 두고 계신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명하신 선배님들. 드디어 내 번호가 불렸다. 넵 하고 종종걸음으로 재촉해갔다.
처음 누워본 그곳은 마치 어부의 장화나 수산시장에서 쓰는 고무 앞치마의 감촉같았다. 물기까지 촉촉하니 생선이 된 기분이었다. 이모님은 프로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업이 진행됐다. 단단히 단련된 팔근육이 느껴졌다.
툭툭. 툭툭. 말을 못 알아듣는 나에게 ‘옆으로’라고 말씀하셨다. 세신 매니아인 내 친구가 잘 알아들으라고 알려줬었는데, 식혜에 취해 까먹었나보다. 그렇게 우리는 합을 맞춰갔다. 한참이 지나 기분 좋은 클렌저 향이 코끝에 퍼지며 드디어 나의 첫 세신이 막을 내렸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30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탕에 들어갔다. 온 몸의 뭉친 근육들이 풀린 것 같은 나른한 기분. 뽀드득해진 피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식혜가 이제 갈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최종 만족도 120%. 성공적인 도전이었다. 8할은 식혜가 다한 것 같지만. 다음번 세신은 경력자 답게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준비물:
- 현금 이만오천원
- 기력을 보충해줄 음료수 500ml
- 한 타임은 30분이니 대기줄 보고 눈치껏 준비
- 경력자로서의 자신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