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고
‘인간은 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박민규, 『갑을고시원체류기』)’ 이 문장을 계속 되뇌게 된다.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 나에게 심심할 여유 같은 건 없는데도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일까. 다른 사람을 보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방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친밀한 타인이 얼마나 있든지 각자 밀실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드니 친소, 호불호에 상관없이 그저 외로워보일 뿐이다. 혼자 울면서 태어나서 밀실에서 살다가 관이라는 밀실에 놓이게 되는 처지인 것은 모두 같지 않은가. 사 놓고 읽지 않았던 『백년의 고독』을 갑자기 집어든 것도 아마 ‘고독’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 거다. 백년 동안 어떤 이가 얼마나 어떻게 고독한지 궁금했다.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은 사촌 관계인 우르술라 이구아란과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게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하면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 마을, 문명을 일궈낸다. 마을에 사람이 많아지고, 정치가 생겨나고, 자본이 들어오고, 분쟁이 생기고, 쇠락한다. 백년 동안.
우르술라와 부엔디아 사이에서는 태어난 이들은 하나같이 고독하다. 고독한 인간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고독 따위엔 관심이 없는 듯 평생을 활기차게 집안을 지탱했던 우르술라는 나중엔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됐음을 숨기려 애쓰며 암흑 속의 고독에서 살아간다. 집시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과학 기술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치기를 즐겨 하던 부엔디아는 결국 진짜 미쳐서 홀로 나무에 묶여 먹고 자고 생활하다 죽는다.
“시간은 흐르게 마련인데, 제가 뭘 바랐겠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토록 빨리 흐르진 않아.” 우르술라가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사형수 감방에 있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으로부터 들은 것과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세월이 방금 전에 수긍했던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원을 그리며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한번 더 몸서리를 쳤다.(201쪽)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황금물고기를 만들고, 다시 녹여,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며 자신을 짓누르고 고독을 견디며 시간을 보낸다. 그의 고독은 진부한 반복과 시간의 무의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방에 틀어박혀 양피지 해독에만 몰두하며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거부한다. 레나타 레메디오스는 페르난다에 의해 수녀원에 갇혀 평생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홀로 지내다 죽는 것까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 가문의 모든 인물이 백년 동안 계속 고독하다.
이야기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환상과 현실 사이를 경계없이 오가고, 근친상간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고독한 인간들의 삶을 보면서 조금은 덜 고독했다. “그래. 인생은 원래 고독한거지. 나만 고독한 게 아니지. 이건 백년 전에도, 백년 후에도.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그런거지.” 하는 위로를 받았다.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에게 먹히고 있다.(31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행에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그 방에서 절대로 나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이해했는데, 그것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양피지의 해독을 마친 순간 거울의 도시(또는 신기루들)는 바람에 의해 부서질 것이고,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릴 것이고, 또 백년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19쪽)
책을 왜 읽는지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나는 위로 받으려고 책을 읽는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외롭고 고독한지를 토로했을 때 도대체 어떤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소설은, 이 가문의 이야기는, 백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내서 나를 위로해준다. “이런 일도 있단다. 너무 외로워할 필요 없어.”
고독한 삶에 책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