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진, <나를 키운 여자들>을 읽고
3년 동안 육아 휴직을 했다. 행복하기도, 힘들기도 했지만 그 시간 덕분에 조금은 어른이 됐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것, 상처받은 만큼 나도 누구를 아프게 했을 거라는 것, 모두가 저마다의 짐을 지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 나를 어른으로 키워준 것은 아이, 시간, 사람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글'이 있다.
그의 '브런치'에서 처음 본 글은 아마 엄마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독 버튼을 누르고 그의 새 글이 있다는 알람이 뜨면 열 일 재치고 정성 들여 꼼꼼히 읽었다. 웃으며 울며, 공감하며 화내며 읽었다. 엄마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엄마와는 어떤 관계로 지내야 할지, 나 자신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던 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글들이었다.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설명하는 그의 문장은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화를 다르게 보게 됐다
영화 <컨택트>는 아이가 생기기 전에 좋아했던 영화다. 엄마가 된 후 <컨택트>에 대한 그의 글 <그럼에도 아기를 갖고 싶다면>을 읽고 이 영화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됐다. 언어가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지, 시간은 흐르는 것인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했던 영화는 이 글을 읽은 후 아이의 끝을 알면서도 다시 아이를 가질 건지 결정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가 없을 때는 막연했던 상상이 너무도 구체적인 공포로 다가와서 눈물이 났다. 내가 주인공 루이스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이전과는 다른 강도로 고민하게 됐다.
헵타포드의 세계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그래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같은 해피엔딩에 집착하는 건 지구인의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현재를 살아가고, 꽃이 시들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씨앗을 심는다. 행복과 불행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에 현재 시제로 깃들어 있다.
홍현진, <나를 키운 여자들>, 314쪽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 결국 나도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결정을 내린다. 이 글을 읽고 <컨택트>는 이제 내게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다. 글 한 편이 같은 영화를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재창조하기도 하는데 그의 글이 그렇다.
읽다 보면 자꾸 울게 됐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어른이 그러면 안 되지, 특히 엄마는 더 그러면 안 되잖아.' 나만의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엄마를 평가했다. 엄마가 되자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엄마가 되지 못할까 두려웠다. 내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이가 나를 평가하고 원망하게 될 것 같았다. 세 살 아이의 말 한마디에 울며 가출하던 날, 나는 내 그릇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어른이라는 걸.
앞의 책, 219쪽
딸이기만 했을 때 엄마가 그러면 안 된다며 마구 평가질했다. 딸이자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를 향했던 손가락이 나를 향하게 된다. 아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두렵고 아이가 커서 뭐라고 하며 원망할지를 상상해 본다. 엄마처럼 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참고 참다가 아이에게 폭발한 다음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도 힘들었구나. 그래서 화가 많이 났었겠구나.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듯이 엄마도 그랬을 뿐이었구나.'
육아 휴직의 시기는 엄마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가장 치열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시간이다. 영화 <레이디 버드>에 대한 글 <울면서 가출한 엄마, 바로 나였다>는 읽고 나서 가장 많이 운 글이다. 영화 속 딸인 크리스틴이 엄마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고 좋아하냐고 묻는 장면을 언급하면서 '엄마에게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울었다(220쪽)'고 쓴 부분을 읽으며 같이 울었다. 속사정이야 각자 다르지만 흔히 애증이라 부르는 엄마에 대한 그 복잡한 얽히고설킨 감정의 타래를 하나하나 풀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그의 글에 깊이 공감했다.
사실은 스스로를 미워했었다
'내가 참 좋다'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내가 싫다'라고 생각해 본 적 역시 없다. 굳이 자신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좋아하는 쪽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다만 싫은 사람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나에게 화를 많이 냈으니까, 가끔 만난 친구는 나와 의견이 달라서, 직장 동료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저 사람은 가부장적이라서, 권위적이라서. 이유는 언제나 넘쳐났고 싫은 사람도 끊이지 않았다.
복직한 작년 1년을 돌아보면서 놀랐던 건 싫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갈등이 왜 없었겠냐마는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한 해 동안 운이 좋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주변 환경보다는 내가 바뀐 것이다. 돌이켜 보면 사실은 타인을 싫어하는 것만큼 스스로를 미워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싫어하는 부분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면 들키기 싫은 모습을 들킨 듯 화들짝 놀라 서둘러 미워한 건 아니었을까.
영화 <우리들>에 대한 글 <왕따였던 나를 오랫동안 미워했다>를 읽고 마음이 아리듯 아팠다. 못난 내 모습을 '몰래 갖다 버리고 싶어 했던(21쪽)'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어서. 하지만 나에게는 그의 글이 있었다. 나보다 앞서 엄마로, 딸로, 여자로,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과정을 솔직하게 써 준 그의 글 덕분에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던 스스로를 이해하게 됐다. 나 자신도 타인도 미워하지 않게 됐다.
그의 글이 나를 키웠다
아이를 낳고 강박적으로 책을 읽었다. 엄마로만 살다가 많이들 얘기하는 '나'를 잃을까 봐. 아이를 어깨에 걸쳐 놓고, 안고, 재우고 책을 읽었지만 그걸로는 '나'를 찾을 수도, 지켜지지도 않았다. 뭔가 허전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글이 찾아왔다. 내가 하는 고민을 어떻게 알았는지 글로 풀어서 설명해 주고, 이해시켜 줬다. 그의 이해와 설명과 공감이 나를 어른으로 키워줬다. 내 상처만 보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한 마디 말로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이 있었기에 3년의 휴직 시기는 힘들었지만 값진 시간이 되었다.
나를 어른으로 키워준 그의 글들이 책이 되었다('브런치' 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영화, 드라마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그의 글이 궁금할 때 온라인에 애써 검색하지 않아도 이제 책만 찾아보면 된다. 영화를 보고 싶은데 뭘 봐야 할지 모를 때 책장을 조금 넘겨 보면 된다. 영화의 줄거리 말고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싶을 때 책을 집어 들기만 하면 된다. 이제 이 책이 어디로 가서 누구를 키워줄지 궁금하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