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나’에게 전해주는 메시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장례를 치르게 된 건 2년 전, 아버지의 소천 때였다. 돌이켜보면, 살아있는 이에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영원과 찰나를 동시에 맞닥트리게 하는 기이한 체험이라 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부터 큰 산과 같던 존재이자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셨던 아버지는 내게 영원한 사랑 그 자체였다. 암 투병 중, 횟수가 늘어나는 항암 치료를 받으시며 점점 약해지시면서도 늘 내 걱정이 우선이셨다. “밥은 먹었니?”, “추운 데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뭐하러 또 왔어. 바쁜데......”, “미안하고 고맙다......” 아버지의 언어는 평상시와도 다름없이 가족 걱정,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그 자체였다. 그 때만 해도 의사들의 언어를 난 믿지 않았다. 언제까지 아버지께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배려를 가장한 조언에도 난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있으셨고,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이시기에 하늘에서도 쉽게 생명의 끈을 놓아주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또 믿었다.
그렇게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께서 재작년 여름 어느 날 감은 눈을 다시 뜨지 않으시던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난 아직도 병원 치료실에서 아버지의 심장 박동이 멈추던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온 세상이 멈춰버린 듯했다. 나의 삶도 아버지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멈춰버린 채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살아계신 아버지를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먹먹함이 밀려왔다. 그 찰나는 내 가슴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단호했다. 그 후 찾아가는 수많은 장례식장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 때의 영원과 찰나가 공존하는 시간의 기이함을 떠올리곤 한다. 삶은 결국 영원과 찰나 이 두 시간의 격차를 자각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쌓여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자 끝이라 하셨다. 그리고 모든 천지 만물을 단 일주일만에 창조하셨다. 또, 하나님의 시간은 사람에게 있어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도 한다. 시간이란 개념은 어찌보면 인간을 위해 임의로 정해진 (인간 세계의) 하나의 룰이라 생각된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과거와 미래와 같은 시간 개념은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라고 했을 때,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하나의 싸인이라 여겨진다. 바로 나의 삶이 유한한다는 것을 수시로 직시해야 함을 알려주기 위한, 그리고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은 곧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어제, 오늘, 내일임을 기억하라는 싸인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바쁜 일상에서 차단된 온전한 ‘나’를 찾게 된다. 그리고 죽음 이후 나를 상상한다. 나를 기억할 많은 사람들과 내가 살아왔던 흔적의 의미, 그리고 내가 가야할 그곳까지도.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을 풀어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곧 ‘죽음’이 나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에 응하는 나의 성실한 대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