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1. 아무도 물어본 적 없지만 나는 가장 완벽한 영화 엔딩으로 <노팅힐>을 꼽을까 생각 중이다.
얼마 전 이 영화를 8번째쯤 봤는데 엔딩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인데프니틀리"라는 마지막 대사와 함께 펼쳐지는 서사는 해피엔딩의 정석 같다.
하지만 엔딩과 별개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은 따로 있다.
"이집 탕수육은 세계 최고지만 왠지 자꾸 생각나는 건 볶음밥입니다"와 같이 두고두고 떠올리는 장면은 바로 이거다.
친구들의 평범한 저녁 식사 자리에 휴 그랜트가 대 배우인 애나(줄리아 로버츠)를 데리고 나타난다. 한 마디로 흔녀인 내 친구가 집들이에 김우빈을 끼고 온 상황. 친구들은 애나 면전에서는 차마 좋아하는 티를 내지 못하다가 휴와 애나가 떠나자 참았던 비명을 지른다. 우주 대스타랑 저녁을 먹다니! 대박!! 죽을 때까지 자랑할 거야!!!
대문 밖으로까지 환호성이 흘러나오자 휴 그랜트는 처진 눈꼬리를 긁으며 자학 개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내가 집에 가면 쟤네 맨날 저래요.
2. 얼마 전엔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로스의 형광 치아라던지, 친구 남친의 불알을 보지 않으려 눈을 꼭 감던 챈들러처럼 굵직한 사건이야 뇌리에 박혀있지만, 어떤 대사들은 처음 보는 것처럼 허를 찌른다.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은 고등학교에 자신도 모르는 안티 카페와 루머가 성행했음을 서른이 넘어 알게 되었다. 그 루머 내용이 아주 가관인데 '레이첼이 남자와 여자 생식기를 모두다 갖고 있다'는 것. '청순가련 여가수 A. 알고 보니 배꼽털 무성' 대략 뭐 이런 느낌의 끔찍한 꼬리표가 붙어다닌 것이다.
이 루머는 꽤 파급력이 강력해서 당사자인 레이첼만 몰랐지, 절친인 모니카마저도 알고 있었단다. 레이첼이 벌컥 화를 내며 "너는... 아닌 걸 알잖아! 왜 지금까지도 이야기를 안해줬냐"고 따지는데, 모니카의 대답이 걸작이다.
말하면, 니가 울면서 그걸 보여줄까봐 무서웠단 말이야.
3. 요즘 우리 회사는 매주 신제품을 쏟아내는 중이라 모든 부서가 정신이 없다.
상품 기획자인 DO님이 잠깐 상의를 하러 들렀다. 멀리서 찾아와 준 동료와는 스몰 토크라도 나누는 게 인지상정.
"요즘 바쁘죠?", "죽겠어요. 바쁘시죠?" "네. 정말 바쁘네요. 더 바쁘시죠?"
근황이라곤 바쁨이 전부인 둘은 대화조차 고장났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할 건 하자~?"라며 DO님을 격려하며 보내주었다.
뒷자리에서 듣고 있던 단님은 "그래도 할 건 하자~?"라는 나의 응원이 너무나 T 같아서 웃음이 난다고 했다.
그렇다. 아무리 바쁜 월요일이라도 내게는 써야할 글이 있다.
할 건 하자~? 는 정신으로 오늘의 글쓰기를 악착같이 마쳤다.
매일 서로의 글쓰기를 체크하기로 한 내 친구가 기록용 엑셀 시트까지 만들었던데,
그녀가 울면서 그것을 보여줄까봐 무섭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