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자주 간다. 엄마 보러 가고, 병원에도 간다. 일로 가는 거라 볼일만 딱 보고 당일치기로 돌아온다. 간혹 하루 잘 적도 있지만, 엄마 집 부근, 병원 부근 호텔에서 하룻밤만 때우고 올뿐, 친구를 만나지도 않는다. 마치 출장처럼.
그러다 동생이 한국에 오면, 서울은 내게 여행지가 된다. 자매들은 서울의 호텔을 신중히 고르고, 거기서 2박 3일 동안 놀고먹고 수다 떤다. 즐겁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이번에는 명동을 골랐다.
“나, 명동 다시 가고 싶어. 1975년 예비고사 마치고 겨울에 처음 갔었어. 50년 만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싶어.”
부산에서 올라와 대입 준비하던 친구들이랑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들떠서 명동에 나갔다. 명동예술극장 앞에 TV 중계차가 사람들을 찍는 것을 보고 피해 다니면서 깔깔댔다.
“울 엄마,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줄 알 텐데.”
그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친구들. 새삼스럽게 찾지는 않는다. 지나간 것은 흘러간 대로 받아들이게 된 시간, 50년. 그리운 건 사람일까, 시간일까.
대학에 들어와서, 기숙사 언니들이랑 명동 오비스캐빈에 가끔 갔었다. 가수들의 공연을 보고, 술도 한잔했지만, 기숙사 통금시간이 9시였던가? 10시였던가?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쉽게 돌아섰던 곳이었다. 그게 어디쯤이었더라? 골목을 돌아다니며 찾아보지만, 너무 변한 거리에 짐작조차 못 하겠다.
그러다가 길 한 가운데 우뚝 섰다. 카톨릭회관이 마주 보이는 길.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낸다.
“와 아직 그대로다!”
70년대 후반에 대학 생활을 보낸 우리에게 명동의 상징은 명동성당과 카톨릭회관이었다. 길은 모두 바뀌어도, 두 건물이 아직 그대로다. 건물이 가장 잘 보이는 옥상 노천카페에 앉아 한참 바라본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애라고 여겼던 친구 미나가 명동성당 옆에 있던 계성여고를 다녔는데, 그 학교는 어디로 갔을까?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50년 전 명동이 내 안에서 넘실대면서 많은 추억을 소환하고, 나는 무심히 그날들을 바라본다. 이 자리를 떠나면 나는 그들과 이곳을 잊고 또 현재를 살아가겠지.
자매들이 만나면 많이 걷는다. 하루 만 보는 훌쩍 넘긴다. 그날은 남산길을 걷기로 했다. ‘목멱산방’에서 담백한 식사부터 한다. 밥알과 참기름이 꼬들꼬들, 고소하다.
“우리도 이 정도는 맛 낼 수 있지 않니?”
“언니도 제주도에 하나 차려.”
“이제 일은 그만 벌이고 싶어. 일, 평생 많이 했잖아?”
올가을에 나는 고3 수능을 마치면서 일을 거의 정리했다. 조촐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나에게 좀 더 집중하고 싶다.
그날 남산은 단풍이 절정이었다. 기온 탓인지 제주에서 잘 보지 못한 새빨간 단풍잎이 넘치도록 많아 하늘을 실컷 바라보고, 누렸다. 한 할머니는 휠체어를 스스로 운전하며 다닌다. 그렇게 잘 된 길이 고마웠다.
“이 부근에 살면 매일 이 길 올 것 같아!”
남산을 걸었더니 13,000보가 넘는다. 오후 늦게 마사지 받으러 갔다.
“40분은 기계로, 20분은 손으로 합니다.”
“아, 전 기계로 하는 건 싫은데요.”
“그럼, 손으로 다 해드릴 수도 있어요.”
점장은 한 사람을 부른다. 알고 보니 그녀는 초짜였다. 그러나 젊은 그녀는 커다랗고 힘 있는 손길로 시원시원하게 마사지한다. 나는 기분 좋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딱 십 분이었다. 다음은 대나무봉을 가져와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 분 후엔 다른 기구를 가져와 문지른다. 30분을 넘으며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한다.
“저는 손으로 하는 것만 원했는데, 이 집은 저랑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가 잘못한 건 아닙니다. 여기서 그만하고 싶어요.”
인터뷰에서 본 이 가게 대표의 철학이 떠오르며 씁쓸해졌다.
‘정성스럽게 만져주면 몸도 마음도 회복된다.’
그녀는 기계가 아닌 손의 힘만으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 테라피 기술을 창안했지만, 지점에서는 이렇게 제멋대로 하는 모양이다. 일찍 마사지를 그만두고 온 나에게 동생들이 한 마디했다.
“아니, 약손이라매. 그럼, 손으로 조물조물해야지.”
서귀포의 내 단골 마사지샵 아주머니가 그리웠다. 세 시간 동안 명동보다 싼 값에, 그저 손으로 전신의 막힌 부분을 풀어주는 그녀야말로 진정한 약손이었다.
손님이 많으면 사람보다 돈벌이에 더 치중하게 되나? 현재의 명동은 일본, 중국 관광객으로 넘친다. 부디 그들에게도 돈벌이보다 친절이 더 큰 가치인 나라라는 추억을 남겨주기 바란다.
예전 같으면 늙은이였을 60대 자매 셋은 일에서도, 신체 능력에서도 어지간한 젊은이들 못지않게 아직 싱싱하다. 걷기도 잘하고, 일도 많이 한다. 중늙은이이지만, 나는 우리가 늙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조금씩 낡아가지만, 놀기엔 적당한 나이이다.
“올해 가족이 가고, 보리도 가면서 허망하기보다는 보통의 하루가 정말 귀해졌어. 매일 퇴근한 남편과 마주하는 저녁 식사가 감사하고. 잠들기 직전에도 하루에 다시 감사하고.”
살아갈수록 일상의 하나하나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