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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Mar 12. 2021

고대 일본인의 악(惡)의 세계

도적의 역사 2 <곤쟈크모노가타리슈10>

 한 시대의 국가와 사회가 문제 삼던 과제-이는 주로 당 시대의 악(惡)으로 규정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의 해결 과정의 모습 등은, 그 시대인의 정신세계를 비춰 보여준다. 


일본의 율령 법이나 정사(正史)를 살펴보면, 고대 일본 조정이 가장 심각하게 여겼던 사회적 문제, 즉 악행의 대표적인 것은-살인이나 국가 전복 같은 역적 행위가 아니고-,'절도ㆍ강도ㆍ군도(群盜)'와 같은, 이른바 도적

행위였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곤쟈크 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권 29에는 '본조(本朝) 악행'편을 설정하여, 많은 '도적'담을 싣고 있다. 그 예가 아래와 같다.


명법 박사 조교 기요하라 요시즈미라는 자가 있었다.전문학식이 대단히 뛰어나 옛 박사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나이 70세 이상 넘어도 세간에서 중용되었다.....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이때 요시즈미는 (숨어 있다가) 마루 아래에서 서둘러 나와 도적들이 나가는 뒤로 문에 달려 나가 소리 높여 말하길,  "야, 너희들  낯짝 모두 봤다. 날이 새면 게비이시의 장관에게 말해서 모조리 체포하게 할 거다"라고 화가 나는 대로 소리치고..... 도적들은 이 말을 듣고 달려 돌아와..... 큰 칼로..... 죽여 버렸다.

"요시즈미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조금도 야마토 타마시(和魂)가 없는 자로, 이런 유치한 말을 해서 죽었던 거다"라고, 전해 들은 사람들은 비난하였다고 전해온다.(29-20)


일본 고대국가에 있어서의 '도(盜)'는, 특별한 은사(恩赦)가 내려질 때조차 그러한 사면의 범주에서도 제외되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중대  범죄의 하나였다. 


헤이안 시대 이후 각종의 문서・일기・법령 등에  "도적으로 처할 것(盗人に処すべし)", "도적의 죄과로 취급할 것(盗人の罪科を被るべし)", 혹은"도적에 의거(盗人の准拠)" 등의 용어가 관용구 또는 주술어처럼 사용되었던 것은, '도범(盗犯)'= 기피해야 할 중대 범죄라는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결과라 생각된다.


이에 비해 당시 살인에 대한 죄의식은 오히려 미비해서,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사면의 범주에 들어갔던 것(고의적  살인은 예외)과 대비된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실제 도적 행위가 발각되거나 붙잡히게 되면, 재지에서 또는 피해 당사자에 의해 자치적으로 ‘살해’당했고,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적질 하러 들어간 자는 상대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는 경우가 많다.


"세츠 국(摂津国)에 영지에 숙직하러 올라온 게스 오토코(신분이 낮은 자;下衆男)가 있었는데……(도적 모의를 주인에게 밀고했다). 주인은 ……게스(下衆)는 물욕에 눈이 멀어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 법인데, 대단한 일이다’ 하고……(강도하러 들어온) 호우멘(放免) 10명을 병사 4,50명을 동원하여 붙잡았다……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남에게 알리지 않고 밤에 몰래 밖으로 데려나가 모두 사살(射殺)해 버렸다"(29-6)     



그런데 위와 같이<곤쟈크>29권 악행 편에 도적에 대한 일화를 가득 싣고 있지만, 그 일화들을 통해 편자가 남긴 교훈의 메시지는 정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물건을 함께 펼쳐 분명하지 않은 사람 등에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자가 있는 것이다. 종자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하물며 친하지 않은 자로서 그런 마음 있다면 이는 반드시 의심해야 할 일이라고 전해온다"(29-7)

 "산중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에게 활, 화살을 건넨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29-23)

"굉장히 좋다고 이야기해도, 게스(신분 낮은 자)가 말하는 일은 믿고 따르면 안 된다.……"(29-24) 


 <곤쟈크> 속에는 도적질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주장하거나, 이를 응징할 것을 외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조심하지 않았던 것을 비난하거나, 있다고 자랑하지 말 것, 가까운 자라도 믿지 말고 의심할 것, 당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 등을 주의시키고, 위(29-20)와 같이 '야마토 타마시', 즉 임기응변의  대응력, 처세술을  강조하는데 주력한다.

 피해당한 측의 잘못을 도적질보다  더 큰 '악'적 요소로 지적하려는 태도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도적에 맞서 이를 강력히 근절시키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이와 타협하고, 조심하고, 의심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등이, 그들이 피해 갈 수 없었던 '악-도(盜)'의 세계에 대응하면서 키워 온 현실 인식이자, 생존을 위한 마음가짐이었다.


         부동 명왕 입상(不動明王立像;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 香川県弘憲寺)



항시적인 사회 '악'으로서 '도적'의 문제는 이후 중세 사무라이 시대를 통해서도 근절되지 못하였다.

일본 중세에 있어서 도적은, 병이나 기근과 같이, 악신(悪神)의 저주-재앙의 하나로 인식되기도 하였다(笠松宏至<中世の罪と罰>). 


16세기 후기 왜구들이 사라지게 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戦国) 통일기였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까지 중앙이 갖가지의 '도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도적' 문제에 곪아버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불어 도적질을 문제 삼는 의식도 강건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지금은 남의 물건에 손을 잘 대지 않는 정직함으로 유명하다. 

또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측의 문제로서 보는 의식이 발달하여, 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 주의시키는 강한 경계 의식이 지금까지도 일본 사회에 진하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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