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기요유키의 의견12개조)
한 나라가 그 기초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반을 쌓아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는 필시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지난 난 남겨진 역사서에는 대체로 일부 지배자층에 관한 기록밖에 남겨져 있지 않지만 말이다(일본의 육국사는 5위 이상의 귀족 중심의 기록이다).
그러했던 시작도 어느 시간인가 흐른 뒤, 결국 망해 버렸다.
물론 일본이라는 국명은 여전히 존속되었지만, 나라(奈良), 쿄토(京都)를 수도 삼아 출발했던 고대 시절의 정권은 막을 내려버렸다.
그 쇠미의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료가 눈에 들어온다.
엔기(延喜)14(914)년 2月15일, 당시 시키부 오스케(式部大輔)였던 미요시 기요유키(三善清行)는 천황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일명 ‘의견12개조(意見十二箇条)’).
먼저 그는 국가가 출범한 이래 국고가 막대히 소모되었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쇼무(聖武)천황 때) 7도(七道) 각 구니(国)마다 고쿠분지(國分寺)와 니지(尼寺) 2사(二寺)를 두게 하는 등, 많은 절을 짓는 비용으로 10분의 5,
2. 간무(桓武)천황 때 나가오카(長岡) 천도, 헤이안쿄(平安京) 천도로 토목, 조용(調庸)의 쓰임으로 5분의 3,
3. 닌묘(仁明)천황 때 사치를 즐겨서 2분의 1,
4. 죠관(貞観)년 중에 오텐몬(応天門) 및 다이고쿠덴(大極殿)이 자주 화재가 일어나 1분의 반
더불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저는 지난 관표(寛平)5(893)년에 비츄(備中;지금의 오카야마 현)의 스케(介;2등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시모츠미치노 고오리(下道郡)에 니마노 사토(邇磨鄕)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 풍토기(風土記)를 살펴보니,
고고쿠(皇極)천황 6(663)년에…… 백제가 우리 나라에 사절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여 천황은 쓰쿠시(筑紫)의 행궁(行宮;임시 거처지)에 가서……어느 지역(郷)를 살펴보니, 사람이 몹시 많아 ……천황이 조(詔)를 내려 군사를 모집하니 2만의 군사가 모였습니다. 천황은 몹시 기뻐서 그 지역을 니마노 사토(二万郷;이만향)라 이름 하였습니다. 뒤에 고쳐서 니마노 사토(邇磨郷)라 불렀습니다.
그 뒤 ……텐표진고(天平神護;765-766)년 중 우대신(右大臣) 기비노 마키비(吉備朝臣)가 대신(大臣)으로서 이 지역 고오리(郡)의 다이료(大領;우두머리)를 겸했습니다. 그때 이 사토(郷)의 호구를 조사해 보니까 겨우 1900여명이었습니다.
죠관(貞観;859-876)년간 초에, 고(故) 민부경(民部卿) 후지와라노 야스노리(藤原保則朝臣)가 이 지역의 스케(介)로 근무했을 때 ……대장(大帳;호적 작성의 기초 조사)을 기록하면서 과정(課丁;세금을 부담하는 남자)를 세어보니 70여명이었습니다.
내(기요유키)가 와서 다시 호구를 살펴보니, 노정(老丁;61-65세)이 2명, 정정(正丁;21-60세)이 4명, 중남(中男;17-20세)이 3명 있었습니다.
지난 엔기(延喜)11(911)년에 그 지역 스케인 후지와라노 긴토시(藤原公利)가 임기가 끝나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니마노 사토(邇磨郷)의 인구는 어느 정도인가 물었더니, “한사람도 남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삼가 연기(年紀)를 따지자니, 고코쿠천황 6년부터 엔기(延喜)11년에 이르기까지 합 252년간, 그 쇠폐(衰弊)의 빠름이, 이미 적은 바와 같습니다. 이 한 사토(郷)의 예로 보아도 국가가 쇠해 쓰러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 수가 있습니다. ……
7세기 중엽, 2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을 정도(실제 그 연령의 인구는 3배 이상)에서, 약 232년 후에는 “한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일본 고대 국가의 세금 구조는 가혹했다.
조(租;구분전(口分田)의 수확의 약3%를 벼(稲)로 납입), 용(庸;수도에서 10일간의 노동, 대신 마포(麻布), 조(調;견이나 생사, 철 등 제 국(諸国)의 산물)을 납입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 위에 조, 용을 수도까지 운반하는 운각(運脚)은 그 과정에서의 식량, 모든 비용을 자기가 부담해야 했다. 직접 운반하지 않는 자는 그 비용을 분담했다.
또 보통 연간 수도에서 10일의 노동 이외로도 지역에서 60일을 한도로 무상 노역에 참가해야 했다(잡요雑徭).
그 뿐인가. 수도 경비를 위한 에지(衛士) 생활을 1년간, 변방 규슈(九州)지역에 사키모리(防人)로 3년간 근무해야했다(병역兵役). 국 중의 21-60세 남자 가운데 3분의 1이 병사로 징병되었고, 식량, 무기는 자기부담이었다.
당시의 많은 양민(良民)들은 그 과정에서 차라리 호적에 기입된 거주지를 떠나 도망가거나 부랑(浮浪)의 길을 택하였다. 면세 신분의 사도승(私度僧)이 되거나 부유 귀족들의 사유지(장원)에 딸린 예속인이 되어갔다.
현물납을 운반하는 왕복의 길 위에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추위로 죽었다는 기사가 산견한다.
이런 시대에 <만엽집>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남겨졌다.
「つるばみの 衣は人みな事なしと 言ひし時より 着ほしく思ほゆ」
쓰루바미(つるばみ;도토리로 물들인) 옷을 입은 사람(천민)은 모두 별다른 (힘든)일 없다고 들은 뒤로는
(나도 그 옷을) 입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천민(賎民)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세금은 양민 계층의 의무였고, 천민은 관청이나 개인의 재물로 간주되어 인신노동을 담당).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면야 미천한 천민이 되는것이 차라리 낫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애환이 전해진다.
나랏님들의 거듭된 대규모 공사와 사치, 부실 치안 등과 더불어 날이 갈수록 신분에 따른 빈부 차가 심해지기만 하던 시절.
대다수 민중들의 삶의 애로와 고통은 해결되지 못한 채, 니마노 사토와 같이 한때 번성했던 지역조차도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일본 고대 국가는 이렇게 망해 갔다.
사료를 읽어 내리는 한 호흡 사이에, 한 시대의 흥망이 강물처럼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