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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Apr 04. 2021

"화한 간에 비할 바 없이 우매한 군주"

원정기(院政期)

일본 고대 국가 말기, 원정(院政, 인세이)이라는 정치형태가 출현하였다.


원정이란, 천황의 자리를 물러난 상황(上皇) 또는 법황(法皇;출가한 상황)이 원청(院廳)에서 국정을 행사하는 것이다(‘원정’이란 명칭은 에도 말기 라이산요(頼山陽)가 <日本外史>에 쓴 것이 최초).

막부가 성립되기 이전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주인이 천황 하나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본의 왕권=천황의 권력은 반드시 동의어는 아니다.”(伊藤喜良「王権 をめぐる穢れ・ 恐怖・ 差別」)라는 설명이 나오게 된다.      


1086년 시라카와(白河) 상황을 시작으로 해서 이후 15세기 후반까지 거의 계속적으로 원정이 행해졌으며, 중세 일본조정의 중요 정치형태이기도 하였다. 이는 1840년 고카쿠(光格)상황이 사망하기 전까지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황제의 아버지라도 황제의 신하였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천황의 아버지인 상황은 천황과 동급의, 혹은 그 이상의 권한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상황의 문서(인청하문 院廳下文, 인선 院宣)는 천황의 조칙(詔勅)이나 선지(宣旨)와 마찬가지로 중시되었다.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법황이란 출가한 상황)의 요망으로 그려진 조근행행(朝勤行幸)(摸本); <年中行事絵巻>田中家 소장


무엇 때문에 이러한 원정이 성립하게 되었는가.     


학계에서는 “섭관 귀족 정치를 억제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등등의 이유가 설명된다. “섭관가인 후지와라씨의 장원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억압받고 있던 중하급 귀족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권”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풀이된다. 


즉 황위 계승 문제를 포함해 정권을 좌지우지하며, 대규모 장원의 보유자였던 섭관가 후지와라 세력에 대한 반발이 이러한 원정을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천황의 힘과 권위가 미약하여, 이러한 별도의 시스템을 탄생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수토쿠 원(崇徳院)   도바 원(鳥羽院).


고도바 원(後鳥羽院) , 고시라카와 원(後白河院) ;   <天子摂関御影>宮内庁 소장



이렇게 탄생한 원정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원정의 출발과 동시에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 무사의 정치 표면에의 등장이다.

원이 그 측근 경호를 위해 무사단을 조직하였고, 겐지(源氏), 다이라씨(平氏) 등의 무가가 정계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이에 뒤질세라 섭관가도 무가와의 연결을 도모하게 됨으로써, 무력 분쟁 발생이 가속화 하게 된다.

니조(二条)천황을 경호하는 헤이씨(平氏)무사들 <平氏物語絵巻>東京国立博物館 소장



또 상황 주위에는 중하급 귀족, 부유한 즈료(受領)나 후비(后妃), 유모(乳母) 일족 등, 원의 근신(院近臣)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상황의 힘을 빌려 수익이 풍부한 지역의 고쿠시(国司)에 임명되는 등의 관직을 얻고 권세를 형성하였다.     


최초의 시라가와 원(白河院) 치세 시기만 하더라도 부(富)와 권력의 이미지가 강하다.

록쇼지(六勝寺; 「勝」자가 붙는 천황가의 6개 절)와 같은 고간지(御願寺)의 건립, 대규모의 법회(法会) 거행, 10수회에 걸친 구마노(熊野) 참례(参詣) 등, 이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 관리에게 ‘봉사’를 요구했으며, 매위(売位), 매관(売官)도 성행하였다.     


시라카와 원이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가모가와(鴨川)의 물(교토의 치수), 야마호우시(山法師; 연력사(延暦寺) 승병), 스고로쿠(双六)의 사이노 메(賽の目;주사위 눈, 즉 도박)의 3개"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源平盛衰記>).


또 법승사(法勝寺)의 법회가 비가 와서 4번이나 연기되자 화가 나서, "비를 용기에 담아 투옥했다"(<古事談>)고 하니,

그의 전횡이 어느 정도였나 추측해 보게 한다.


이런 가운데 시라카와 원(재위 1072-1086)은,  

“나 정도의 제왕이 이전에는 없었다(我許の帝王、以前に不御座也)”(<大外記師遠記>大治2(1127)年6月1日条,<歴代残闕日記三>所取)하며,   

천황 때에도 못 다 이룬 부와 실권을 잡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자찬한다.  

   


이러한 원정의 치세가 일본 역사에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대로 법과 관계없이 지모쿠 조이(除目叙位;관직 임명, 관위 수여)를 행하였다. 고금에 아직 없던 일이다.……단지 이(理)와 비(非)는 확실히 구분하고, 상벌이 분명하고, 애악(愛惡)이 극단적이고, 빈부에 의한 차별이 현저하였다. 특별히 총애하는 남녀가 많음으로써 이로 인해 천하의 질서가 깨졌다. 이에 상하 중인(上下衆人), 어찌 그 마음의 힘이 견딜 수 있었을까.”(<中右記>후지와라 무네타다(藤原宗忠)1087-1138년간의 일기)      


시라카와 원정 말기, 상황의 전제적 성격이 강해지자, 이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게 된다. 호리카와(堀河)천황으로부터 신임 받고, 시라카와 상황에게도 중용되었던 후지와라 무네타다였지만, 상황이 사망한 뒤, 그는 위와 같이 상황의 치세를 평가했다.      


고시라카와(後白河;재위1155-1158, 1192년 사망)원정에 대한 당대의 평가 또한 만만치 않다. 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더욱 두드러진다.     


“모반의 신하를 옆에 두고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고금에 예가 없는 우매한 성격으로, 간신히 덕(德)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주위의 의도에 관계없이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 한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다는 것 2가지”(<玉葉>후지와라 가네자네 일기 ;寿永3(1184)年3月16日条)     


 "이 같은 재난은 법황의 사치스런 욕망과 허튼 정치와 겐지(源氏)의 일탈된 악행으로부터 나왔다.(동寿永2年9月3日条)      


법황은 감히 국가가 어지럽고 쇠함을 모른다. 요즘 큰 공사를 시작했다고 운운. 원중(院中)의 상하, 탄식 말고 달리 할 수 있을까. 정말로 불법(仏法), 왕법(王法)이 사멸되는 때이다. (동寿永2年9月5日条)]

          

법황은 흑백을 구별 못한다. ……단지 한마디의 미친 의혹으로 만기의 거무(巨務)를 다스리려 한다. 모계(謀計)의 도달, 명벌(冥罰) 분명 빠른가. 지탄해야 마땅하다.(동寿永2年9月6日条)     


섭관(攝関)의 지위를 노리던 구조(후지와라) 가네자네(九条兼実)는 그의 야심을 달성하게 되지 못하자, 그 분풀이를 합쳐서 이렇듯 법황을 향해 가차 없는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부었다. 더불어     


화한(和漢;일본, 중국) 간에 비할 바 없이 우매한 군주(暗主)”라고 평한, 후지와라 신제이(藤原信西;고시라카와의 유모의 남편)의 말도 덧붙여 기록해 둔다.(동寿永3년3月16日)      



원정의 출발 시라카와, 고시라카와, 고도바(後鳥羽) 원정기에는 이렇듯 귀족(섭관)과의 갈등이 최고조를 보이며, 귀족들의 비판 한가운데 원(院)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라의 정중앙에서 그들이 이렇게 투닥거리는 가운데, 일본의 고대 국가는 무너져 내려갔다.

결국 무가의 헤이 씨 일족과 그를 이은 가마쿠라(鎌倉) 막부(1185년경 성립)에 나라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후에 고도바 원(後鳥羽院)이 공가(公家) 세력 회복을 위해 막부 타도를 외치고 나왔지만(죠큐(承久)의 난,1221년), 귀족 사회는 오히려 이를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하고 앉아 있었다.

같은 조정의 공가(公家) 귀족들은 결코 고도바 원의 편이 아니었다.      


죠큐의 난 후, 막부는 천황을 폐위시키고 세 명의 상황-고도바(後鳥羽)는 오키(隠岐;시마네현 앞바다 섬)에, 츠치미가토(土御門)는 도사국(土佐国;고치현)에, 쥰토쿠(順徳)는 사도(佐渡;니이가타현 앞바다 섬)로 유배를 보내 버린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교토 조정은 유명무실화 되었고, 막부 세력이 절대적으로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고대 국가의 주력이었던 공가의 망(亡), 중세적 무가의 흥(興)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원정기의 현상에 대해, 천황가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일본의 학계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원정기는 원(院)・천황 개인의 타부(금기)나 마기(マギー)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되어, ‘신’에서 ‘인간’으로의 전화가 이루어졌다.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신에 대한 사제자이며 동시에 신 그 자체로서 많은 타부에 둘러싸였던 종래의 천황 성격이 극적으로 변화한 것이 원정기”

라고, 일본의 유명한 중세사 학자는 말한다(石井進<院政時代>).     


그러나 ‘신’이었던 원(院)이 극적으로, 갑자기 ‘인간화’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비약에 가깝다.      


원에 대한 혹독한 비판 기록이 다수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원의 권위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원정기 이전부터의, 황위 계승을 비롯한 조정 정사를 후지와라 섭관가가 좌지우지 했던 상황, 천황가의 미약했던 ‘권위’로부터 이어진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앞 체제의 모순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탄생시켰어도, 새로이 권력을 잡은 자가 문제해결 능력이 없고,오히려 걸머쥔 권력으로 전횡을 부리는 모순을 반복했을 때,

그 나라의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결과 남은 것은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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