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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Apr 17. 2021

“헤이 씨 집안 아닌 자는, 사람이 아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

 “헤이 씨 집안 아닌 자는, 사람이 아니다(此一門にあらざらむ人は、皆人非人なるべし)<平家物語>)”    

 

헤이 씨(平氏=다이라 씨)는 간무(桓武) 천황의 증손 다카모치왕(高望王)을 시조로 하는 집안이다.

그 헤이 씨 집안의 흥륭에서 쇠망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헤이케 모노카타리(平家物語)>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씌여져 있다(가마쿠라 중기 작품, 작자 미상).     


기온 정사(祇園精舍;인도에서 부처 생존 시 세워진 사원) 종소리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이요, 사라쌍수(沙羅雙樹;부처가 열반할 때 고사하였다는 나무) 꽃 색깔은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로다.

교만한 자 오래가지 못하니 마치 봄날 밤 꿈과 같다. 용맹한 자 또한 결국 망하거늘 단지 바람 앞 티끌과 다름없다.


멀리 이국의 예를 보건대 진나라 조고(趙高), 한나라 왕망(王莽), 양나라 주이(周伊), 당나라 녹산(祿山) 이들은 모두 구주 선황(舊主先皇)의 다스림을 따르지 않고 쾌락만을 추구하며, 간언을 듣지 않고 천하가 어지러워짐을 깨닫지 못하고 민간의 걱정하는 바를 알지 못하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망한 자들이다.


가까이 본국을 살피건대 쇼헤이(承平) 연간의 마사카도(將門), 텐쿄(天慶) 연간의 스미토모(純友), 고와(康和) 연간의 요시치카(義親), 헤이지(平治) 연간의 노부요리(信賴), 이들은 교만한 마음도 용맹한 일도 모두 대단하였으나,

아주 가까이로 로쿠하라(六波羅)에 살던 출가자이며 전 태정대신 다이라(平) 아손(朝臣) 기요모리 (淸盛) 공(公)이라는 사람이야말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이 마음으로나 말로나 이루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이 <헤이케 모노가타리>는 전국을 돌아다니던 맹인 비와법사(琵琶法師)에 의해 구두로 읊어지는 가타리(語り)로서 중세 시대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시나노(信濃) 전 장관(前司) 유키나카(行長)가 <헤이케 모노가타리>를 만들고, 쇼부츠(生佛)라는 맹인 비와 법사에게 읊게 했다는 기록이 <도연초(徒然抄)>에 보인다. 그림은<慕帰絵>, 東京国立博物館 소장



헤이 씨 무사가 정치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원정(院政)의 출현과 같은 시기였다.

시라카와(白河) 천황(재위 1072-1086)은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 상황(上皇)이 되자, 후지와라 섭관가(摂関家)의 간섭을 배제하고, 후계자를 자신의 계통으로 이으려는 의도로 원정을 시작하였다고 말해진다. 즉 원정이란, 국가의 율령 법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인사권을 장악하고 정치의 실권을 행사하고자 만든 변칙적인 시스템이었다.     


원정이 시작되면서, 호쿠멘노 부시(北面の武士), 사무라이 도코로(武者所) 등이 만들어지고 원(院)에 의한 무사 조직의 거점이 되었다. 이때 겐지(源氏), 헤이 씨(平氏) 등의 무사단이 그 측근으로 경호를 담당하게 된다. 특히 간무 헤이 씨(桓武平氏) 일족, 중하급 귀족이 원(院)의 근신(近臣)을 형성하였다.


당시 사유지(장원)를 둘러싸고 대사사(大寺社)에 의한 강소(強訴)가 빈발하였고, 섭관가도 겐지 무사(源氏武士)와의 결합을 도모하는 등, 중앙 정계의 제 세력이 무장화 되던 시절이었다. 서로 간에 알력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무력 충돌로 발전할 수 있는 단계로 치닫고 있던 시국이었다.                    



헤이 씨 집안의 인물로 조정을 놀라게 했던 자는 이전 시기에도 존재했다.   

940(天慶3)년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가 난을 일으켰다.


     “적어도 나 마사카도(将門)는 찰제(刹帝; 간무 천황)의 후예로 삼세(三世)의 말엽(末葉)이다. 이왕이면 8국(八国)으로부터 시작해 왕성을 점거하고자 한다”고 선언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이름하여 신황(新皇)이라 불렀다"(<쇼몬키(将門記, 장문기)>, 10세기 말 ー11세기 초 성립).     


마사카도가  “(왕위)에 오르겠다”는 뜻의 서장(書状)을 조정에 전하자,     


이에 경(京)의 관리들이 크게 놀라고, 궁중에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 본 천황(스쟈크 천황)은 불천(仏天)에 빌기 위해 궐내에 7 대사(七大寺)의 명승(名僧)을 청하고,  8 대명신(八大明神)에게 빌었다.……즉 본황(本皇)은 자리에서 내려와 두 손을 이마 위에 대었고,  백관(百官)은 재개하고 천 번의 기도를 사원에 청했다.……(<쇼몬키>)     


라고 하며, 천황과 조정 관리들이 놀라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마사카도의 반역에 대해 “신불(神仏)에 기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던 귀족 정권의 비참한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永積安明 <軍記物語の世界>).     


 <다이라노 마사카도 일대기(平将門一代記)>平将門退治図会, 船橋市西図書館 소장



이렇듯 관동(関東) 지방의 독립 왕국을 지향하며 싸우던 마사카도는, 날라 오던 화살에 맞아 그만 쓰러지고 만다. 그의 목은 교토로 운반되어 옥문에 내걸려졌다.


마사카도의 난은 큰 충격을 남겼고, 그가 죽은 뒤 많은 전설을 낳았다. 그의 머리 무덤을 모시는 신사에 일본인들은 지금도 참배를 가고, 마츠리를 한다.    

   

            감옥 문에 걸린 마사카도의 목("3일간 색이 변하지 않고, 눈도 닫지 않았다"라고 전해진다)

              < 平将門一代記>船橋市西図書館 소장


            

도쿄 오오테마치(大手町)의 머리무덤(首塚)                          에도기(江戸期)의 오오테마치의 머리무덤<平将門故蹟考>

  <마사카토의 머리 무덤(将門の首塚)>;"후지와라 히데다타(秀郷)에게 잘린 마사카도의 목이 도쿄(東京)에까지 날아왔다"는 전설을 낳음. 에도시대에 인기를 모음.  


마사카도를 모시는 간다묘진 마츠리(神田明神 祭り) <朝日百科 日本の歴史3>

마사카도는 현재 도쿄 간다 신사(神田神社)의 마모리 가미(守り神;수호신)이다.

"반역자(反逆者)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것은 일본의 특징"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원정이 출현한 뒤, 허약한 왕권을 뒤엎고 아예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1118-1181)이다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의 아들. 실제로는 시라카와(白河) 상황의 가쿠시고(隠し子;사생아)라 전해진다).

다다모리 사후 헤이 씨 무사단을 이끌고 정계에 진출한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헤이지의 난(平治의 乱;1159년)을 통해 정적을 일소하고 원정의 신임을 얻게 된다.   



산조도노 야키 우치(三条殿焼き討ち);야키 우치(태워서 쳐부숨)는 요루우치(夜打ち;밤에 쳐부숨)와 더불어 유력한 전술의 하나였다(<平治物語絵詞>보스턴 미술관 소장)


   

기요모리는 인신(人臣) 최고의 자리인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취임한다(1167년). 교토(京都)의 로쿠하라(六波羅)에 대저택을 두어 헤이시 정권을 확립시키고 무력에 의한 강압정치를 행하였다.

이 정권을 로쿠하라 정권(六波羅政権)이라 부른다. 무사정권이라 해도 귀족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귀족 섭관가가 그러했듯, 이번에는 헤이시 일족들이 차례로 정계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전 국토의 반, 500여 곳의 장원을 소유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헤이 씨 집안 아닌 자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며(기요모리의 처남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 왈), 약 20년 간에 걸쳐 헤이 씨 천국을 구가하였다.     


기요모리는 이밖에도 세츠(摂津;고우베 시 神戸市) 세토내해(瀬戸内海)로부터 규슈(九州) 하카타(博多)에 이르는 구니(国)와 좋은 항만을 획득하여 남송(南宋) 무역을 적극 추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일본에 많은 송전(宋銭)과 서적이 입수되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



헤이 씨 정권은 무사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았고, 자신들만의 독점적, 독보적 권력을 지향하였다.

그 결과 여타 무사 계급의 지지를 잃게 된다. 권력을 빼앗긴 귀족과 상황, 사원 세력도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기요모리는 반대파를 강고히 숙청했다. 고시라카와(後白河) 상황을 유폐하고, 관백(関白) 이하 다수 귀족의 관직을 박탈, 처벌, 귀양 보내고, 원정을 정지시켰다(1179년).      

1180(治承4)년, 다카쿠라(高倉)천황 마저도 강제 퇴위시키고, 딸 도쿠코(徳子)가 낳은 3살박이 안토쿠(安徳) 천황을 즉위시킨다. 이제까지의 후지와라 귀족정권이 그러하였듯, 자신도 천황의 외조부으로서 확고한 권세를 걸머쥐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성자필쇠(盛者必衰)”라 하던가......      


모치히토 왕(以仁王; 고시라카와의 둘째 아들)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는 삼정사(三井寺)와 흥복사(興福寺)를 한편으로 하여 헤이 씨 타도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호응하여 무사(재지 영주)들이 차례로 일어났다.

그들은 각지의 고쿠시(国司)나 장원 영주(荘園領主)에 대항하여 소유지의 지배권을 강화, 확대하려 하였으며, 그 장해가 되는 헤이 씨 정권을 싫어했던 것이다. 내란은 전국 5년 간에 걸쳐 지속되었다(지쇼(治承)•즈에이(寿永)의 내란).     


기요모리는 아예 세츠(摂津)의 후쿠하라 경(福原京)으로 천도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자 하였지만, 반헤이씨(反平氏) 움직임이 거세지자 이를 중단하고 교토로 돌아온다. 그리고 돌연 열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향년 64세였다.

"요리토모의 목을 잘라 내 묘지에 걸어야 한다"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기요모리는 죽었다. <平家物語絵巻>

   

1185년 나가토(長門;야마구치 현)의 단노 우라노 해전(壇の浦の海戦)은 헤이 씨 일족의 묘터가 되었다.

패배한 헤이 씨 일족과, 외조모의 품에 안긴 8살의 안토쿠 천황(재위 1180-1185)은 바다로 들어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디에 가는 것인지 묻는 어린 손자에게 니이아마(二位尼;기요모리의 처)는

"저 파도 밑에야말로 극락정토라는 좋은 도읍지가 있으니, 거기에 함께 가는 것"이라 말하였다 전한다(巻11「先帝御入水の事」)  


고대의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권력자 집안과, 천왕의 죽음인 것이다.

이때 천황가의 삼종의 신기(三種의 神器) 중, 보검(宝剣)도 같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애달픈 사연과 심정이 다음과 같이 남겨졌다.


십선제왕(十善帝王;안토쿠 천황), 도읍을 나와 몸을 해저에 가라앉히고, 대신(大臣)・공경(公卿), 대로에 걸쳐 그 목이 옥문(獄門)에 걸렸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원령(怨霊; 안토쿠 천황과 헤이 씨 일족)은 두려운 것이며, 세상이 어찌 있든 간에, 마음 있는 자로 한탄하지 않는 자 없다.(<헤이케 모노가타리>元暦2(1185) 3月)          


 모순에 찬 천황권과 귀족 정권에 대항하여, 무력과 경제력을 구축하고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던 헤이 씨 일족-다이라노 마사카도, 다이라노 기요모리.      


“헤이 씨가 아니면 사람도 아닐” 정도로 흥하였으나, 결국은 ‘성자필쇠’의 한 예가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왜 실패하였을까.


그것을 잘 배운다면, 후대에 귀중한 ‘교훈’을 남겨준 것으로, 그들의 생은 역사적 의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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