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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Feb 26. 2021

'권위 없는 권력자'의 나라

다이고 천황<도현상인 명도 소생기>


1990년대이다. 일본에 가서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신쥬크(新宿)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 미야자와(宮沢)다”하며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 뛰어들 갔다.


‘유명인사인가 보다, 나도 가서 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 뒤를 쫓아 가는데, 앞쪽에 먼저 갔던 사람들이 방향을 돌려 오면서 “뭐야, 마야자와잖아”하면서, 실망기 어린 어조로 흩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그대로 가보았다.


당시 수상이었던 미와자와 기이치(宮沢喜一;1991 ー1992년의 내각총리대신)씨가 검은색 큰 차를 타고 뭔가의 일로 신쥬크에 출동한 것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이 나타난 것인데, 그 대통령 격인, 수상 ‘미야자와’씨가 온 것임을 확인하자, 사람들은 실망하여 자기 갈 길로 흩어져 가버린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하니 일본인 친구가 웃으며, “미야자와라고 하니까 아마도 사람들은 미야자와 리에(1973년생, 즉 당시 10대 후반의 여배우)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미야자와 수상이라 실망했다보다”라고 말해 주었다.  


 나의 감각으로 보자면, 길에서 갑자기 대통령이든 수상이든 나타나면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을 텐데……여지없이 뒤를 돌리며 가버렸던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 자못 이상스러웠다.

 

이후 일본에 대해 공부하며, 정치가가 인기가 없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은 면, 좀 더 이야기하자면 정치에 대한 권위의식이 빈약한 면들이 적지 않게 내 눈에 비춰지게 되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정치가라든지, 종교인이라든지, 이러한 사회적 지위에 대한 권위의식이 비교적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 요 얼마 전에도 일본 역사 <히스토리 시리즈>의 유튜브를 시청하는데,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승진 신화를 이루어 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인지 모를”운운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가루(足軽)의 농민병에서부터 일본 최고위의 자리인 섭관(攝關)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출신에 의한 계급적 질서가 제법 명백히 유지되었던 일본 역사상 독보적인 인물로 일본에서도 꽤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인데도 말이다.     


 고대 말기에 지어진<도현상인 명도 소생기(道賢上人冥途蘇生記)>(<부상략기(扶桑略記)>25인용)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다이고 천황)이 불자(仏子; 도현道賢)를 보고 불러 말하길, “나는 일본금강각대왕(日本金剛覺大王)의 아들이다. 그런데 지금 이 철굴(鐵窟)의 고통을 받고 있다. 저 태정 천신(太政天神)이 원한 때문에 불법을 소멸시키고, 중생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그 짓는 악보(惡報)는 모두 나에게로 온다. 나는 그 원한의 근원이기 때문에 지금 이 고통을 받고 있다. 태정 천신은 스가와라 미치자네(菅臣)이다. 이 신하는 숙세(宿世)의 복력(福力)으로 대위덕지천(大威德之天)이 되었다.


내 아비 법왕(法王)을 험로(險路)에서 보행하게 하여 심신을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 그 죄의 첫 번째다.

나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성부(聖父)는 아랫자리에 앉혀 속상하게 하고 눈물을 떨구게 한 것이 그 죄의 2번째다.

현신(賢臣)을 죄 없이 잘못 유배시킨 것이 그 죄의 3번째다.

오랫동안 국위(國位)를 탐하면서 원망을 얻고, 법을 해한 것이 그 죄의 4번째다

스스로 원적(怨敵)이 타중생에게 해를 끼치게 한 것이 그 죄의 5번째이다.


이 5가지가 기본이고 그 나머지 지엽적인 죄는 무수히 많다. 고통을 받으며 쉴 수가 없다. 괴롭구나, 슬프구나.

너는 내 말대로 주상(主上)에게 보고해라. 내 몸이 몹시 괴로우니 빨리 구제하도록 운운.

또 섭정대신(攝政大臣)은 나의 고통을 구원하기 위해 1만 소도바(率都婆)를 세우도록 알려라.”

     

도현(道賢)은 지옥의 철굴에서 가책의 고통을 받고 있는 엔기 제왕(延喜帝王; 다이고 천황 醍醐天皇)의 이와 같은 하소연을 전하고 있다. 나체인 3명의 신하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다이고 천황은 이처럼 아비 우다(宇多)천황을 괴롭히고 무시한 것, 죄 없는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을 유배시키고, 국위(国位)를 탐하며 불법(仏法)을 멸하여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힌 등의 5가지 죄에 의해 천만천신(天満天神信仰)의 권속의 독기가 닿아 지옥에 떨어져 견디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전한다.


이 ‘지옥에 떨어진 설화(堕地獄説話)’는 널리 유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이고 천황(재위 897-930)이라고 하면 이른바 「엔기의 치(延喜の治)」라는 천황 친정(親政)에 의한 선정(善政)의 시대를 구가한 것으로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많은 의식(儀式)의 정비, 법률서인 격식(格式)이나 국사(國史)의 편찬, 지방정치의 진흥 등이 이루어진 ‘성대(聖代)’를 만들어낸 인물로서, 11세기의 문인 층에 의해 칭송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적에도 아랑곳없이 사실상 정반대의 이야기가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다이고 천황이 천신, 즉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원령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저주받는 왕'으로 인식되고, ‘지옥에 떨어진 천황’이라는 설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다이고 천황과 3인의 신하들(松崎天神縁起). 防府天満宮 소장


이러한 설화의 성립은, 당시 천황, 천황가를 둘러싼 인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밖에도 천황 가에 관한 저주담을 많이 싣고 있고 있는 기록(<北野天神縁起絵巻>가마쿠라(鎌倉)시대 성립),

레이제이(冷泉;재위 967-969)와 그의 아들 가잔(花山;재위 984-986) 등, 정신병을 앓는 천황의 일화를 싣고 있는 기록들( <大鏡>2-35,36,3-15,31,33,34,35,36),

죽은 망령의 저주를 받는다고 인식되던 천황들(冷泉, 円融, 花山, 三条, 小一条院;<栄花物語>권 第1月의 宴, <小右記>寛和元(985)년8月27日, 同長和4年五月7日条,長和4(1015)년5月4日条寛仁4(1020)년10月2日条 ) 등,

'저주 받고''미치광이 짓을 하는' 천황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와 더불어 천황을 비롯하여 천황가의 인물들이 ‘망령’이 되어  ‘사기(邪氣)’의 짓을 벌였다는 이야기들도 보인다.

천황, 천황가는‘악령에 의한 괴로힘’을 받을 만한 존재이자, 그 스스로 ‘악령’적 존재로까지 인식되었던 것이다.


천황에 대한 당대의 이러한 인식들은, 최강의 독재 집안 후지와라 북가와의 거듭된 혼인 관계 속에 그 왕권을 유지해 오던  허약한 천황 가의 위상을 표징한다. 일본 고대 천황들의 권위는 이렇듯 시대가 갈수록 위약하기만 한 것이었다.


결국 고대  말기 발흥한 무사 세력 헤이씨(平氏)과 외척 관계로 이어져 있던 8살의 안토쿠(安徳)천황(재위1180-1185,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손자)은, 헤이 씨의 몰락과 더불어 조모의 품에 안겨 바다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대 왕권, 왕위의 죽음인 것이다(<平家物語>元暦2(1185)년 3月).     


그 뒤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700여년간을 겐지(源氏,그 일족의 도쿠가와 씨)등과 같은 무가 세력의 흥망성쇠 속에 일본 역사가 전개되었고, 그 속에서 천황의 권위, 조정 정치가의 권위는 한낱 미비한 것에 불과하였다.

 

근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천황' 신격화나, 현대 매스컴에서 천황을 띄우는 분위기는, 긴 일본의 역사적 행보 속에서 보면, 사실상 '예외적'정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정치적 우두머리에 대한 특별한 권위, 존중감이 잘 보이지 않은 것은 이렇듯 사실상 오랜 역사적 분위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치가뿐만이 아니고, 종교적 우두머리, 심지어 나이의 장(長) 격인 노인 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권위의식, 위신(威信) 등이 발달하지 않았다. (부자에 대해서는 선망의 시선을 보내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나 역할이, 사람들로부터 흠망을 받는, 혹은 특별한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부(君師父)와 같은 사회질서상의 어른에 대해 절대적 공경을 강조하는 유교 이념의 도입이 미약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도 사료 속을 들여다보면, 일본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권력자의 권위 부족상태에 대해서는, 인성적 리더십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의 역사에서는 기본적으로 권력에 의한 경제력이나 무력이 최고치의 이념으로, 사회적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힘을 가진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은 되었을지언정,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을 법하다.  

참된 인성과 대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리더의 등장이 추구되기 보다는,

만세일계나 황족,귀족의 피를 따지는 가계중심적 고정적 신분관계의 틀이 너무나 오랜 세월,

참된 지도자의 등장을 막아왔다고 볼 수 있다.


왕조의 몰락 없이 천 삼백년 이상을 '일본'으로 지속해 오다보니, 구습의 유제가 강고했고, 일단 세력을 잡은 층에 의해 주도된 시스템이 그 근본적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권력자층에 대한 인성적 존경의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된 상태였다고 말한다면 너무 혹평일까.


 



그래서 일까. 요즘 일본에서는 새 시대의 리더십에 대한 관심과 그에 관련된 담론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매월 제2 일요일 아침 5시 15분, 몇 년간에 걸쳐 현 일본 각계 리더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인터뷰하고 있는 Mbs(毎日放送)의 '더 리더(ザリーダー)’와 같은 프로그램도, 리더력에 방점을 두며 지속적으로 사회를 개명(開明)시켜 나가는데 일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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