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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Sep 28. 2022

일본 역사 최대의 명분-‘조적(朝敵)’


시대적 상황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고대 정권의 각종 모순과 더불어 700년간의 긴 무가(武家)시대에 돌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 일본인들 속에 형성되고 강고해진 관념 중 하나에  ‘조적(朝敵)’이 있다.


조적’이란, 본래 '조정의 적’, 구체적으로 ‘천황, 천자(天子)에 반하는 적’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또는 '역적, 국적(国賊)’『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이 ‘조적’이란 단어는 고대 일본의 정사인 육국사(六国史)에는 보이지 않으며, ‘장군이 정권을 잡은 시대에 보급한 화제한어(和製漢語)’라 말해진다. 특히 고대 말- 중세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는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등과 같은 군기물(軍記物)에 이 같은 ‘조적’관념이 두드러진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 시대에 ‘장군이 조적을 쳐서 국가가 편안히 한다’라는 인식 구도가 있었다는 점(佐伯真一, 『平家物語遡源』).  ‘조적 멸망 사상’(高木武,『日本精神叢書26, 戦記物語と日本精神』),   ‘조적 필멸의 이념, 체제 호지(護持) 사상’이 있었다는 점(杉本圭三郎, 「軍記物語と「天皇制」」) 등을  지적하고 있다.





‘조적’ 관념이 팽배하게 된 배경에, 당시 혼란한 원정기(院政期)의 정세가 있었다. 이에 편승한 무사가 조정에 진출하는 분위기 속에 사회적으로 수많은 사투(私鬪), 합전(合戰)이 발발하였고, 이와 더불어  ‘적’관념이 강고해진 것이다.


       “곳곳처처에서 살해 사건이 도무지 끊이지 않았다.”(『長秋記』) 

      “경사(京師)에서 밤에 연속 살인이, 혹은 대낮에 칼부림 등 운운”(『台記』仁平2(1152)년)  


   이러한 각지 병사(兵たち)들의 사투(私闘)에 개입하여, 그들을 주종제적 관계로 묶어 조직한 것이 겐지(源氏), 헤이씨(平氏) 무사의 장자(長者)였다.


“요즘 사적인 합전에는 조정의 의엄(朝威) 두려워하여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번에는 선지(宣旨;조정명령)를 받은 이상 거리낄 바 없다. 무예를 이때에 펼쳐 이름을 후대에 남겨야 한다.”(保元上)


  호겐(保元)의 난(1156)이 발발하고, 스토쿠 상황(崇徳上皇) 쪽 무사를 조적으로 토벌하라는 선지(宣旨)를 받자,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 1123-60)는 부채를 펼치며 “요시토모, 적어도 무가의 집안에 태어나 이런 일과 만난 것은 행운이다”라며 기뻐하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조정에 의해  ‘모반인(謀反人)’(혐의자 포함)으로 불리던 모든 역사적 인물들이  ‘조적’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 조적의 시작에 대해서인데, 진무(神武)천황 4년, 기슈(紀州) 나구사군(名草郡) 다카오무라(高雄村)에 한 마리의 거미(토착 선주민을 경시한 표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살상했으므로, 관군을 파견해 선지를 읽어 주고 망을 쳐서 덮어 죽였다. 그 이래 야심을 품고 조정을 멸하려던 자는 다음과 같이 ……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20여명이다. 그러나 한사람도 그 뜻을 이룬 자는 없다. 모두 시신이 산야에 버려졌고, 목이 옥문(獄門)에 걸렸다.(平家5-6 朝敵揃)


“우리 집안(平家)은 호겐·헤이지(平治) 때부터 빈번히 조적을 평정하여 권상(勧賞)이 넘쳤고, 천황의 외척이 되고,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어  일족의 승진이 60여명, 20여년 이래로 즐거움과 번영이 비할 바 없었는데, ……”(平家3ー12)


“요리토모(頼朝)님은 고시라카와 (後白河) 상황의 원선(院宣)이라는 말에 감사함으로……원선에 3번 절하고 열었다. ‘요즘 수년간 헤이씨(平氏)는 황실을 무시하고 정도(政道)를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불법을 파멸시키고, 조정의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신의 나라이다. ……이에 신의 조력(助力)에 매달리고, 혹은 칙명(勅命)의 뜻을 지켜 빨리 헤이씨(平氏) 일당을 물리치고 조정의 원적(怨敵)을 물리쳐라. 선조 대대로의 병략에 따라 선조 대대로의 봉공의 충근에 힘써 입신하고 집안을 일으켜라.’라는 것으로, 원선은 이와 같다.……治承4年7月14日’……이 원선을 견 주머니에 넣어 이시바시야마 합전 때도 요리토모님은 목에 걸고 있었다고 한다.”(平家5-11)


“조적을 정벌하여 숙원을 이루는 일에 겐페이(源平) 우열은 없지만, 호겐・헤이지 난 이후로는 많은 차이가 나서 교류를 맺지도 못하고 주종 관계 이상으로 뒤떨어져 버렸습니다.……세간의 양상을 잘 살펴보면 표면상은 따르는 듯하지만, 내심으로는 헤이케를 질투하지 않는 자가 없어 보입니다. ”(平家4ー3)


이전에 요리토모를 토벌하러 동국(東国)으로 출발하던 헤이케(平家)의 대장군을 ‘조적을 평정하러 외토(外土)로 향하는 장군’으로 평가하던 것이(保元下1, 平家3─12), 그 반대로 헤이케 측이 ‘조적’으로 전락하였다(平家5─11).

이처럼 ‘조적’이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가변하는 상대적인 것이었고,구체적으로는 사실상 ‘질투’ 나는 상대(敵)였다.


요리토모의 거병이 ‘조정의 원적(怨敵)’을 치러가는 것으로, 그의 행동은 고시라카와원(後白河院)의 원선(院宣)에 의해 타당성을 획득한다. 이렇듯 ‘조적’ 논리의 중심에는 ‘조정’ 즉 천황가(天皇家)가 존재한다.

겐지, 헤이씨 무사들은 각자 황권에 연결된 자신의 혈연적 계보를 이용해 정체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위한 싸움을 벌였다. 그 상대가 ‘적’이었고, 조정 원선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여 ‘조적’으로 공적화(公敵化) 시켰다. 일본역사에서 무사들 간의 세력싸움에 공의적(公義的) 명분을 제공한 한 것이 조정(천황가)이였다고 할 수 있다.


   “가마쿠라의 요리토모님은 무네모리(宗盛)님과 대면했다.……‘특별히 헤이케(平家)를 나의 사적(私敵)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은  죽은 기요모리(清盛)님의 허락이 없었다면 내 목숨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조적이 되어 토벌하라는 원선(院宣)을 받은 이상, 천황이 지배하는 토지에 태어나 칙명(勅命)을 배반할 수도 없고…… ”(平家11─17)


전날의 은인의 자식에 대해서도, ‘조적’이기 때문에 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칠 수 있었다. 자신의 이권싸움 정당화에 ‘조적’이 활용된 것이다.


더불어 ‘조적’은 곧 ‘불법(仏法)의 원수’, ‘불적(仏敵)’‘법적(法敵)’으로도 간주되었다.


“흥복사(興福寺)의 대중(大衆)은 시게히라(重衡)를 건네받자 그 처분에 대해 평의(評議)했다. ‘……불적(仏敵)・법적(法敵)의 역신(逆臣)이므로 동대사・흥복사 담벼락을 끌고 돌린 뒤에 목까지 땅 속에 묻을까, 아니면 목에 대패질 할까’ 라고 이야기 나눴다.”(平家12ー1)


그리하여 이러한 ‘원적(怨敵)을 귀복(帰伏)시킨다’(保元上7)는 종교적 당위성을 확보하며, 그들의 목적(욕망) 달성에 활용하였다. 종교를 도구삼아 이념적으로 용하고, 이에 반대하는 ‘적’ 에 대해 승리를 보장해 주는 기원 처로 삼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적’이란, 조정(천황가)과 혈연적 계보로 연결된 겐지(源氏), 헤이씨(平氏) 등의 무사 세력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조적’으로 공적화(公敵化) 시킨 개념이었다.

 당시 그들 자신도 신뢰하지 않았던 ‘조정(천황가)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또 ‘신의 가호’라는 종교적 명분까지 획득하며, 상대방을 ‘조적’혹은 ‘불적(법적)’으로 내몰아 자신의 이권 싸움을 타당화했다.

 ‘조적’ 이념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군기모노가타리 편자의 기술 속에는 당시의 원정(院政)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 보이며, 조정 권위(왕권)가 추락한 시대였음을 시사한다. 이런 분위기에 형성된 ‘조적’의 이념은 시대 말 혼란기에 권력쟁취의 싸움을 벌이던 자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며 내세웠던 허세의 명분이었다.

즉 일본 역사 최대의 명분 ‘조적’은, 싸움의 실 이유가 대의적(大義的)이지 못하고, 현실적 이익관계를 추구하며 가변적으로 작용한 이념이었다.


이러한  ‘조적’ 관념은 고대 말 이후 급속히 퍼졌고, 이후 일본역사를 통해 정착, 상용화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종래의 천황과, 무가에 의해 옹립된 천황이 서로를 ‘조적’이라 부르고,

막부 말기나 메이지 초기에는 조정의 뜻에 반하는 인물이나, 그렇게 간주된 자를 매도하는 문구로서 ‘조적’의 호칭이 사용되는 등, 일본에서는 장기간 ‘조적’ 이데올로기가 활용되었다.

즉 대립 세력에 대해 서로를 ‘조적’이라 부르며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등에 용한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그 누군가를 '조적'이라 말하는데 거리낌 없는 일본 매스컴의 모습은, 그들이 만들어 온 역사적 인식의 반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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