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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Jan 17. 2022

엄마도 어릴 땐 다 흘리고 먹었어

아빠도? 응 아빠도. 할아버지도? 그럼! 할아버지도!


하루의 끝 늘 아이와 나란히 누워 오늘 일을 눈다. 너와 함께라 즐거웠던 간, 사랑스러워 꼭 안아주고 싶던 간, 고맙고 미안했던 마음 같은 걸 전하는데, 그러면 아이도 아직 서툰 언어 총동원하여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끔은 내가 생각 못한 주제를 던지기도 하고, 재잘재잘 끝없이 말을 늘어놓는 통에 나는 맞장구만  때도 있다. '쿠쿠아오' 알 수 없는 소리만 내던 아이가 자라 어느덧 핑퐁핑퐁 대화가 된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저녁으로 미트볼 파스타를 먹은 날이었다. 요즘 최애 음식이라 맛있었단 말이 듣고 싶은 마음에 답정너 질문을 해보았다.


"오늘 우리 미트볼 파스타 먹었지. 맛있었어?"


금방 "맞아!"하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잠시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동문서답을 했다.


"온유는 노는 시간이 좋아."


하핫, 이게 무슨 말이니 엄마가 물은 건 노는 게 아니잖니,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대화를 이었다.


"노는 시간 좋지. 엄마도 노는 거 좋아. 밥 먹는 시간도 좋아?"

"안 좋아."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물론 파스타가 맛있다는 대답을 못 들어서가 아니었다. 아직 먹이는 걱정을 더 해야 하나, 하는 골치 꽤나 썩는 문제였다.




사실 나는 '밥안모' 카페의 회원이다. '밥안모'는 '밥을 안 먹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모임'의 줄임말이다. 그렇다. 나는 밥을 참 지지리도 잘  먹는 아이의 엄마인 것이다.

어떤 때는 채소만 몇 개 집어먹고 끝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밥 한두 숟갈 먹고는 "다 먹었어!" 하고 당당히 아기의자에서 내려가기도 했다. 아이가 하루를 한두 숟갈로 버티면 나도 그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아이의 몸무게는 늘지를 않았고, 나 살이 빠져갔다.


더러는 나에게 '애들이 안 먹을 때도 있지, 어른도 밥맛 없을 때 있지 않냐'는 말을 건네는 지인도 있었다. 위로라고 한 말일 테니 참고 삼켰지만, '안 먹을 때'도 있는 것과 늘 안 먹는 것은 너무나 다르며 어른이 안 먹는 것과, 영양공급이 건강과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의 아이가 먹지 않는 것은 비할 바가 아니잖냐는 말이, 속사포처럼 목구멍까지 솟았다가 한참을 표류한 뒤 가라앉았다.


이유식 전에는 내 모유가 문제가 있나, 이유식 후에는 내가 요리를 못해서 그런가, 자책의 시간은 참 지루하게도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두 돌 조금 전부터 갑자기 꽤 잘 먹기 시작했고, 일시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서 이제 좀 먹는 기쁨을 안 건가, 한시름 놓은 참이었다. 아이도 나도 무게가 늘었고, 집에 들른 친구는 밥 잘 먹는 아이를 보고 "니가 왜 얼굴이 폈나 했더니 온유가 잘 먹어서 그렇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안 먹던 시기에 그나마 잘 통했던 딸기......새우볶음밥..... 워낙 안먹어서 이런 짓도 했다.




그런데 밥 먹는 게 안 좋다니!! 얘야 이게 무슨 쪘던 살 도로 빠지는 것 같은 소리니.

아, 혹시 '밥'먹는 시간이라고 물어서 그런가? 밥 말고 다른 거면 괜찮을까? 그런 거겠지?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으나 아이의 대답은 여전했고, 이어지는 말이 너무나 의외라 깜짝 놀랐다.


"온유가! 파스타를 먹다가 흘려서! 기분이 안 좋아."

"먹다가 흘려서 기분이 안 좋아?"

"온유가 저번에는! 포도주스도 먹다가 흘렸지!"


세상에. 먹다가 흘려서 기분이 안 좋은 거였다니!! 피어올랐던 걱정이 거품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심각한 얼굴로 자기의 실수를 고민하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말투며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순간 빵 터질 뻔했지만 남의 심각함에 웃는 건 예의가 아니니 주먹을 꽉 쥐고 참아내었다.


사실 아이는 전에 비해 너무나 깨끗이 먹는 편이었다. 한때는 없으면 안 됐던 앞치마를 이제는 정말 간혹 사용하는데, 그나마도 앞치마에 묻는 건 별로 없다. 그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고, 그렇게 된 데는 너의 수없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예전엔 요거트도 먹다가 엎었지! 요즘은 이렇게 엎진 않잖아.


"온유가 파스타랑 포도주스 먹다가 흘려서 속상했구나. 그래도 잘하고 있는 거야. 원래 처음에는  이 흘렸었는데, 매일 연습을 해서 이제는 조금밖에 안 흘렸잖아."

"조금밖에 안 흘렸."

"맞아! 원래 아기들은 다 흘리는 거야. 엄마도 아기 때는 엄청 흘리고 먹었는데, 자꾸자꾸 연습을 했더니 안 흘리게 됐지."

"아빠도?"

"응 아빠도."

"할아버지도?"

"그럼! 할아버지도 엄청 흘리고 먹었대."


나의 말이 위로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는 뒤로 몇 마디를 더 재잘재잘 나눈 뒤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이와 함께 걷다 보면 걸음을 잠시 멈추어야 할 때가 많다. 녀는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새를 보기도 하고 바닥에 고개를 묻은 채 조개껍데기 같은 걸 열심히 파내기도 하고 또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있을 때도 있다.

어떤 때는 왔던 길을 도로 돌아가기도 한다.

마음이 넉넉할 때야 두고 보는 게 어렵지 않지만 시간을 쪼개어 써야 하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재촉을 하게 된다. 얼른 와야지, 그쪽 아니야, 이러면 늦어, 같은 말들을 하면서.



잠든 아이의 손바닥을 문지르며 생각해보니, 어쩌면 먹다가 흘려서 속상한 기분이 들게 만든 건 내가 아닐까 싶었다.

물을 연거푸 세 번이나 쏟았던 날, 우유를 쏟아서 가구에 다 튀었던 날, 앞치마가 답답하다며 기어코 벗고 먹다가 체리를 다 흘려 옷이 새빨갛게 물들었던 날. 아이 앞에서 '아이고... 다 흘리네...'라는 말을 하기도, 표정이 좀 굳기도 했다.

더군다나 먹는 것 없이 그러고 있을 땐 걱정하는 마음 앞세워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니 먹는 시간이 아이에게 마냥 즐겁고 유쾌할리가.


아직은 서툴고 어색한 게 더 많은, 그래서 어쩌다가 밥을 한 톨 안 흘리고 입에 넣으면 그게 그렇게 대단해서 어깨 으쓱거리는 아이에게, 좀 더 오래 박수쳐주는 여유를 가져야지. 더러 잘 먹지 않더라도 그걸로 심각해져서 얼굴 찌푸리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박수치며 기다리면, 옹알이가 기어이 대화가 되었듯이, 아이는 반드시 자랄 것이다. 겨를 이 내딛던 걸음을 가만히 붙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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