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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양 Apr 25. 2022

봉쇄된 도시에서 남편과 호텔 방에 갇혀 버렸다.

팬데믹 시대의 외국인



2020년 3월,

나와 남편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6개월째 체류 중이었다.


코로나가 서서히 전 세계를 잠식하기

시작했던 그때,


말레이시아는 나라의 국경을 닫고,

도시를 봉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



3월 16일 밤,

말레이시아 총리는 하루의 시간을 주고

18일부터 국민들의 이동을 제한한다는

발표를 했다.


비필수 업종의 회사는 모두 영업을 중단하거나

재택근무를 해야 했다.

다음날 출근했던 남편은 노트북과 서류들을

잔뜩 챙겨서 일찌감치 돌아왔다.


우리는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텔 레지던스에

살고 있었다.


작은 주방과 거실, 침실과 욕실로 이루어진

원 베드 룸 타입이었다.


서재나 책상이 따로 없었기에 남편은 재택근무를 위해

식탁에 노트북을 세팅했다.

육중한 대리석 모서리에 부딪칠 때면

식탁이 쓸데없이 크다고 불만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쓸데없이 커서 다행이었다.


전날 마트에서 식재료들을 잔뜩 사 오긴 했지만

도시 봉쇄라는 초유의 사태를 처음 겪어보는지라

마음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봉쇄 전날 밤,

언제 다시 외식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파빌리온에 있는 딘타이펑에서

저녁을 배달시켰다.


(이후 봉쇄령 기간 동안 식당은 테이크아웃과

배달이 가능했다.

봉쇄 첫 발표 이후 자세한 규칙들은 시간차를 두고 발표되었다.

봉쇄 초반에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음식을 쌓아둬야 한다는 조바심은 여전했고

딤섬을 냉동시켜둘 생각으로

딘타이펑에서 잘못 주문한 게 아니냐며

확인 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정부에서 발표한 이동제한령의 기간은 2주,

남편과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방 안에서 푹 쉬는 2주 간의 호캉스로 생각하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늦은 밤

호텔 측의 공지 사항,

선택할 수 있는 아침 식사 메뉴,

추가된 룸서비스 메뉴 등이 적힌 여러 장의

종이가 방에 전해졌다.


정부의 지침으로 인해 호텔 안의 레스토랑들,

피트니스 센터, 게임센터, 수영장을 닫는다고 했다.


빨래 서비스도 일주일에 세 번으로 축소되었다.


조식 뷔페 레스토랑 대신 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줄 테니 원하는 메뉴를 전화로 주문하라는 공지였다.


외국인(관광객)의 입국이 금지되고

다중 이용 시설도 폐쇄되는 상황,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쫓겨났다는 어떤 외국인 루머를

들었던 터라 내심 걱정했는데

호텔이 문을 닫는 건 아니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



본격적인 봉쇄 첫날의 아침이 밝았다.


남편은 새벽마다 호텔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고

레지던스 라운지나 1층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었는데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각자의 노트북을 보면서

일을 하다보니

아침이 도착했다.


조식은 아메리칸 스타일과 현지식 중 골라서 주문할 수 있었다


방에 가져다 준 아메리칸 블랙퍼스트 타입의

조식을 방 안에서 먹는 기분이 색달랐다.

어쩌면 앞으로 호텔 방 안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최악으로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아침을 먹고 튜터와 온라인 영어 수업을

진행했다.

온라인 수업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대면 수업이 불가능해져서

어쩔 수 없었다.

교포 남편이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데

그 앞에서 영어를 쓰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이미 돈을 지불한 수업까지만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2주 뒤 봉쇄가 풀리면 다시 대면 수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게임 대신 일을 한다는 것과

창 밖의 도로에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단 사실만 빼면

봉쇄 첫날은 외출을 하지 않은 어느 주말 오후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



봉쇄 초반,

이동제한령이라는 초유의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건

내국인이나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직장이 폐쇄되자 마치 휴가라도 받은 듯

고향 도시로 떠난 현지인들도 있었고,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몽키아라 지역에선

이동제한령이 내려졌음에도

조깅을 하던 외국인들이 체포되었단 뉴스도

보았다.

(그중에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향 방문길이나,

산책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부는

도시 간 이동은 더욱 엄격히 제한하고

검문을 강화했다.


나는 봉쇄 3일 차에 처음으로

호텔 방을 나섰다.


글 쓰는 게 직업인 나와

게임을 좋아하는 남편은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그리 어려워하는

타입은 아니었었다.


그런데 내가 자의적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과,

누군가 강제적으로 외출을 금지시켜버린 건

그 체감적 고통이 달랐다.

고작 사흘인데도,

신선한 공기와 햇빛이 너무 그리웠다.



+




정부에서는 며칠 뒤부터 좀 더 강력하게

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식재료나 의약품 구입 등

필수적인 일로 외출을 할 경우에도

반경 10km 이내로만 가능,

검문 시 10km 이내 거주지를

증명할 수 있는 증빙서류와 신분증도

있어야 했다.

한 집 당 1명만 외출이 가능했고

아이들은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이 남편과 함께 하는

마지막 외출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에 내려온 순간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

트리 점등식에 뉴스팀이 취재를 올 정도로

화려했고,

관광하기에 위치가 좋아서 늘 관광객으로

붐비던 호텔의 로비가

초라할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조식을 먹던 1층의 레스토랑과

방청소를 할 때 종종 내려와 커피를 마시던 카페도

조명이 모두 꺼지고 문이 닫혔다.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이 하루아침에 금지되었으니

호텔 측의 타격도 상당할 거란 짐작이 되었다.



+



내가 살고 있는 쿠알라룸푸르의

시내 한 복판,

파빌리온 근방은 한국으로 치면

강남역 정도 될까.

(서울 사람이 아니라서 적당한 곳과

비유하기가 어렵다..)


회색빛 통창에 동남아의 강렬한 햇살이 반사되는

하늘까지 솟은 빌딩들은 텅 비었고,

늘 차로 꽉꽉 막혀 있던 도로에도

차량은 드물고

배달 오토바이만 간혹 눈에 띄었다.


쇼핑몰로 가는 내내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강남 한복판에 사람들과 차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길.


전쟁이 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난 것치고

빌딩들이 너무 온전하니까,

영화 ‘나는 전설이다’처럼

햇빛을 볼 수 없어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들의 도시 같았다.

훤한 대낮이었지만 인적이 드문 도심을

걸어가는 길이 남편과 함께인데도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데 앞으로는 식재료를 사러

나 혼자 다녀야 하니 한숨만 나올 뿐.

(함께 외출할 수 없으니

나는 식재료, 남편은 무거운 생수 구입을

맡기로 했다)


파빌리온의 아케이드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음식과 술을 마시는 레스토랑과 펍들이 있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이젠 대부분의 레스토랑과 카페, 술집의 문이

닫혀 있었다.

몇몇의 가게가

문을 열어두고 있었지만

포장과 배달 주문을 위해서였고

매장 안의 의자들을 모두 치워버린 상황이었다.


걸어가면 사람들에게 어깨가 치일 정도로 붐볐던 곳인데..


온갖 명품 매장이 모두 입점해있는 화려하고 거대했던

쇼핑몰도 지하의 마트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외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나중에 곰팡이가 핀 명품 가방이

매장 안에 가득한 모습이 한국 뉴스에도 나온 적 있다.)


이곳을 채우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



다행히 마트에는 식재료가 넉넉해졌다.

채소와 과일, 고기도 있었다.

특정 브랜드의 식재료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굶어 죽을 일은 없어 보였다.

(우리가 즐겨 먹던 한국 것과 비슷한 쌀이나

크래커, 라면과 파스타 소스 등은 한참 후에나

공급이 됐다)


식재료들을 장바구니에 채워 호텔로 돌아가는

걸음이 느릿했다.


무더운 동남아 날씨에

KF94 마스크가 좀 버겁긴 했지만

유일하게 내게 허락된 외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었다.



+



이후 5일간 외출하지 않았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군인들이 거리를

검문했고,

가뜩이나 텅 빈 거리에 불안감을 느꼈던 나는

외국인 신분으로

딱딱해 보이는 군인들을 마주할 생각만으로도

더럭 겁이 났다.


내가 소심한 편이긴 해도

이 정돈 아니었다.


혼자 외국에서 공부도 했고

혼자 해외여행도 거뜬히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집 근처 마트에도 못 가서

쩔쩔맸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외국에서의

봉쇄령이 나를 더 쪼그라들게 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매일 아침 비슷비슷한 조식 메뉴는 지겨웠고,

청소를 하러 직원들이 오는 것도 불안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실내의 한 공간에 불특정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은

전염병 시대에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봉쇄령 전에는 청소를 하러 오면 외출을 해서

근처 카페에 가버리면 그만이었는데.


제일 견디기 힘든 건 방 안의 텁텁한 공기였다.

호텔 창문은 컸지만 정작 문은 고작 한 뼘쯤 열렸다.

방과 거실 주방까지 두터운 카펫이 깔린 이 방을

온전히 환기시키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내가 이렇게 신선한 공기에 집착하는

인간일 줄이야.

(이동제한령의 규제가 대부분 해제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베란다가 딸린

레지던스로의 이사였다)


사실 마감을 앞두고 사나흘쯤

집 밖에 안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는데

어째서 그렇게 유난히 힘들었을까.


꽉 닫힌 창문,

24시간 돌아가는 에어컨,

얼마나 오랜 먼지가 묵어 있을지 모르는 카펫,

나와 달리 여전히 호텔 방 안에서만 지내는 게

어렵지 않고 아니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다.


죄 없는 남편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기분은 점점 쳐지고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



나는 5일 만에 방을 탈출했다.

혹시 검문을 당할지도 모르니

호텔 측에서 제공해준 거주 증명서와 여권도

꼼꼼히 챙겼다.


장바구니를 들고 거리를 걸으니

의외로 불안하지 않았다.


드물긴 했지만 차와 인적이 있었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을 검문하는

경찰과 군인이 저만치 보이니

두려움보다 안도감이 생겼다.

(하지만 쇼핑몰을 순찰하는 총을 든

군인들을 봤을 땐 다시 긴장하긴 했다.)


마트에도 사람이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폐이셜 가드까지 쓴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식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특히 파빌리온 쇼핑몰 근처에 워낙

호텔과 서비스드 레지던스가 많다 보니

마트 안에 나와 같은 외국인이 많은 점도

위안이 됐다.


사람들은 팬데믹, 봉쇄령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건 고작 2주,

이제 며칠 뒤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다음날 정부는

이동제한령을 2주 더 연장한다는 발표를 했다.


하아,

나 더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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