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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변론자 Dec 29. 2022

엄마의 죽음, 그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다.

죽음은 생각보다 더 가깝고, 생각보다 더 허무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한다. 아주 가까운 존재부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사람들의 죽음까지, 현대의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더 쉽게 죽음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수많은 죽음을 도처에 두고서도 나와는 먼 얘기라고 생각한다. 무섭고 슬픈 일이라고 여기며 고를 돌려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오히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온전히 직시한다. 되려 더 나아가 '죽음'을 잘 다룰 줄 알아야 . 인간은 '죽음'을 통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 때문이다.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 사회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명과 문화 각각의 장례법이 존재한다. 이는 '지적 사고'를 하는 인간 '죽음'을 잘 다루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인간 사에서 '죽음'은 때때로 재앙이기도 했고, 설화와 문명의 시작이기도 했으며, 사회적 규합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인류는 '죽음'을 기록하고 애도하며 기억해왔다. '죽음'을 교훈삼아 성장하고 발전했으며 한층 더 진보된 사고 하는 존재로 나아갔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험이 있다. 가장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통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를 정립 수 있었.


"죽을 거면 지금 죽는 게 가장 좋은 타이밍이겠다."

 14살이 된 해, 삶과 죽음에 대해 고심하던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무감한 깨달음이었다. 그것이 소위, 중2병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내 감정은 이렇다 할 분노나 반항심과 같은 감정은 전혀 없는 담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그러니까 한국나이로 9살에서 10살로 넘어가는 그즈음,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날은 내 기억 속에 흐릿한 독립영화 씬들처럼 남아있다. 부모님은 맞벌이였기에 나와 4살 아래 여동생은 방학 때마다 외할머니 집에서 살곤 했다. 그날도 나와 동생할머니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놀다 지쳐 잠에 들어 있었다. 캄캄하고 고요했던 그날 밤,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와 동생이 함께 누워있던 안방 전화벨이 천둥같이 '따르릉'울렸다. 갑작스러운 소동. 할아버지의 다급한 외침. 여기저기 쿵쾅거리며 흔들리는 작은 주택. 나는 잠에서 깨 울고 있는 동생을 끌어안고 안방 유리창 패턴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인지, 가로등 불빛인지, 출처 모를 불빛이 방바닥과 부딪혀 부서져 내린 빛 조각들을 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엄마를 제외한 온 가족이 함께다. 어두웠다. 아니, 병원 복도는 밝았던 것 같기도 하다. 보통은 잘 깨어있지 않는 시간이었기에 다소 어색한 쌀쌀함 느껴졌다. 아빠가 복도 넘어 좌측 어딘가로 사라졌다 돌아오고는 내 손을 잡고 사라졌던 곳으로 같이 이동했다. 아무래도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애석하게도 병원에서 엄마의 마지막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딘가로 들어가 병원 침대를 본 것 같기는 한 데 말이다. 다시 기억 속 장면이 바뀐다. 나는 성당 맨 앞줄에 앉아 보통은 영성체를 받아먹는 단상 앞 공간에 할머니가 쓰러져 소리치며 울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다. 할머니는 재단 중앙에 놓여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내 주변에는 언젠가 한 번씩 봤던 것 같은 사람들이 같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궁금해져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소 멀리 서있는 할아버지도, 아빠도, 다른 가족들도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안아달라 다가가지 못했다. 내가 엄마의 사진을 들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화장터였다. 엄마가 있다는 관이 어딘가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곧이어 긴 막대를 든 두 사람이 나타나 쿵쿵 소리를 내며 타고 남은 잔해를 빻았다. 밖에서 찢어지는 통곡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어본 울음소리지만 아빠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빠랑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산 올랐다. 아빠에게 안겨 거친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이름 모를 산 어딘가 엄마의 뼈가루를 뿌렸다. 잘 뿌려지지는 않았다.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데로 던지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산에 오르기 전 누군가가 엄마의 사진을 들고 있는 내 어깨를 매만지면서 울지도 않고 의젓하게 있는 것이 대견하다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그저 나를 짓누르는 주위 어른들의 무거운 분위기에 주눅 들어 있었을 뿐, 왜 울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니까.


 엄마는 밤 운전 중 트럭과 충돌 사고가 난 것이라고 했다. 당시 집에서 친구와 시간을 보내던 엄마가 그 친구를 려다 주기 위해 밤 운전을 나섰다가 벌어진 사고였다고 들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큰 병원으로 이송되어 살았고, 불행히 엄마는 작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그러지 못했다고했다. 하필이면 그날 부싸움을 한 이유로 아빠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고 하는데, 아빠는 지금도 그것을 엄마의 사망 원인으로 이야기하며 자책한다.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황망하게 잃은 아빠는 방황 시작했다. 아빠의 세상이 얼마나 무너졌을지는 한 가정을 만든 지금에 와서야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당연하게도 아빠는 나와 동생을 챙길 정신이 없었다. 남은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고 나는 친척집에 맡겨져 눈칫밥을 먹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을 꽤나 오랜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나, 얹혀살고 있는 친척집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상황들은 내가 엄마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인지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어느 날이었다. 습관처럼 주위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아빠가 간신히 방황을 끝내고 나와 동생을 거두어 작은 빌라로 들어간 뒤였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인지 모르게 유독 엄마가 없다는 것이 실감 나는 하루였던 것 같다. 나를 돌봐줄 엄마가 영원히 없어졌구나라는 것을 절감한 때였다. 하교 후 집으로 돌아와 엄마 사진을 찾았다. 오래된 박스 속 앨범들과 함께 나온 사진 무더기에서 엄마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엄마 사진을 끌어안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현실을 살아가야 했기그 이후로 엄마 생각에 눈물 지은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기억 속 화장터에서 울지 못했던 어린  스스로를 지금도 종종 원망고 있기는 하. 


 사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뒤 3~4년의 기억이 많이 없다. 누군가 일부러 그 시기를 머릿속에서 삭제한 것처럼 말이다. 그 시기에 만났던 또래 친구도, 추억도, 그 무엇도 기억에 남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오히려 9살 이전의 기억이 더 풍부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 그저 나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체감해 가던 시간이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힘든 상황들을 억울해하며 하늘을 원망하던 시기였다. 중학생이 되었고 머리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온전하게 인지한 것은 나로 하여금 '죽음' 자체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과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제로 엄마는 정말 하늘나라에 간 것일까. 죽음 본격적으로 사유하고 탐구했다. 종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 생물학적으로 바라보는 '죽음', 공상과학적으로 바라보는 '죽음' 등 많은 서적과 자료들에서 '죽음'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많은 고민 끝에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없어짐(無) 였다. 뭐가 어찌 되고 어떻게 되가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는 죽은 존재는 더 이상 '살아있는 세계'에는 없는(無) 존재가 된다는 사실 이었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고 하더라고 뭐 어쩔 것인가. 더 이상 '죽은' 엄마는 '살아있는 세계'에 있는 우리에게 그 어떤 직접적인 영향 끼칠 수가 없는데 말이다. 아무리 살아있을 때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성취를 이루더라도 '죽음'로써 '살아있는 세계'를 떠나게 되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 더 이상 '그것이 내 것이다.'외칠 수없는 것이다. 또한 죽고 나면 본인이 그동안 가지고 있다가 겨진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든 관여할 수 다. 엄마 본인이 죽고 망가져 가는 우리 집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나, 동생, 그리고 이루고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모두 두고 '죽음'을 맞이한 엄마는 얼마나 억울하고 아쉬웠을까. 그러고 보니 '죽음'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맞이하는 것이 가장 아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가진 게 가장 없을 때가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이 가장 없을 때 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내 인생에 가진 것이 가장 없던 시기였다. 재산과 같은 금전적인 가치의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취미, 친구, 성적, 이루고 싶은 목표나 이루고 있는 성취 등 딱히 가졌다고 할 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아빠와 동생 정도인데, 사실 그것은 별 일이 없다면 일평생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디폴트 값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내가 죽기 가장 좋은 때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죽을 것이라면 지금이 죽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죽음은 너무도 허무했다. 살아있는 동안 달성한 성취들과 재산이 무엇이 그리 소중한가. 결국은 죽음으로서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게 될 텐데 말이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위해 달려간다. 사실상 죽으려고 태어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가장 잘 죽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달성하지 않고 '무소유'의 자세로 인생을 연명하는 것이 아닐까. 극렬한 허무주의였다.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할까. 죽음이 무서워서? 생존 욕구가 모든 생명체들의 본능이기 때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이유로 살기에는 우리는 '인간'이지 않은가. 인간도 지구상 발붙이고 숨 쉬고 살아가는 생명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적 사고'를 하는 동물이지 않은가. 또한 그런 이유만으로 살기에는 인생이란 것은 너무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축복받은 존재답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순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내릴 수 있는 특권이자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고작 해봐야 인생 경험이 일천한 중학생일 뿐이었던 나는 이 이상의 진보된 결론도출해 낼 수 없었다. 그 당시 수많은 사유 끝에 내린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태어났기 때문에 이 힘든 세상을 어쩔 수 없게나마 견디게 되 것이고, 일단은 얼결에 살 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또 죽을 때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도 두려움의 존재였다. 그러니 당장 내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보다는 언젠가 그 미지의 고통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순간이 왔을 때, 혹은 온전히 타의에 의했을 때 죽는 것 났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든 내가 내 '죽음'속에서 아쉽거나 억울하지 않도록 가진 것을 최소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어쩔 수 없이 채워지더라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들로 채워 언제 버려도 아쉽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미숙 14세 소년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이 정도 즈음에서 마무리된다. 꽤나 먼 미래에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내가 절대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생기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미숙했지만 나름의 결론까지 지어낸 그 시기의 사유들은 내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에 큰 작용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본질적인 가치 가려낼 수 있는 시각을 길러주었다. 또 그 소중한 가치를 위해 한눈팔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집중력과 끈기를 주었고, 그 외의 것들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룰 수 있게 하는 여유와 침착함을 준다.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죽음을 통해 좀 더 확고하고 주도적인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한 것이다.


과거 학창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30대의 나는 이제야 진정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고 자신한다. 금의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앞으로 차근히 적어 보겠다.

나이가 들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내가 직접 조촐하게나마 엄마 제사상을 차린다. 기억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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