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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Sep 16. 2017

사실, 당신만을 위한 건 아녜요

계산 않고, 감사하고, 거절하기


호모 사피엔스


요즘의 한국은 예전보다 더 역사 속 한 페이지에서 몇 단락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 같다. 내부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복잡한 국제 정세 가운데에도 우리나라가 등장하는 빈도가 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나도 그 현장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이런 흐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묘한 기시감이 종종 든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오늘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닐까? 이럴 땐, 사람이라는 한 종에 대해서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같아 보이는 일들이 재현되는 듯한 이유는 한 종으로서의 특성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역사책, 소설, TV 나 뉴스, 직접 눈으로 보는 등 다양한 경로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여러 모습을 확인하다 보면, 그 모습에 참 재밌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자신의 정치적 위세나 물질적 이익만을 좇으며 남을 음해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도 있고,  아주 사소할 수 있는 이유 하나에 그럴듯한 명분을 덧붙여 누군가를 해하려는 이도 있다.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부류도 있고, 나만 아니면 돼라며 어떤 경쟁 속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밀어내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반면에 손해를 보는 것을 알더라도 솔직하려고 하는 이도 많다. 목숨을 던져서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구한다거나 하루를 먹고 살아남기 힘든 상황에서도 얼마 안 되는 돈을 모아서 장학금으로 기부한다는 소식을 한 번씩 접할 수도 있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다친 사람을 치료하러 제 발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신의 진급보다는, 그의 의지로 직접 후배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도 한다.



사람을 한 종으로 대하며 조금 떨어져서 관찰하다 보면, 이들은 살면서 참 이상한 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자신의 이득만을 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납득이 가능하다만, 그 반대라니?




되려 제가 기쁘네요.


누군가의 기념일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려 할 때에는 선물을 하기 마련이다. 선물을 전하는 것에는 상대방이 기뻐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물론 때때로 심술보가 터져서 혹은 상대가 언짢아했으면 하는 의도로 하는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와 같은 마음이 담겨있다.


얼핏 보면 선물은 받는 사람만 좋을 것도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대가 선물을 받고 흡족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출발해 선물을 고르고 고르다 보면, 자연스레 이것을 받을 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내가 좋아하는 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겠다는 사실이 나를 더 위로하고 큰 만족감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선물을 전하는 것에는 오히려 이런 시간들을 선물을 받는 측면도 없지 않다. 선물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실로 감사할 일이다.


날 좋은 사람으로 만들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할지라도 행하기 쉽지 않은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실은 이 행위자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그러한 일들을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이나 헌신, 희생으로 일컬어지는 여러 행위들 이면에는 '내가 그러함으로써 무언가에 기여했다는 느낌을 자신이 받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숨어있진 않았을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식의 이유, 나는 그런 것을 꿈꾸고 내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숭고한 가치로 평가되는 것들을 행함에서 어떤 행복이나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행위는 설명이 되기 시작한다.


이런 이해로 사람이라는 종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사람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각자의 기준과 상황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달려 나아가는 것 같다. 어쩌면, 세상에는 남을 위한다는 것은 없는 걸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 속에서 '이건 당신을 위한 일이야'라는 이유를 꺼내 들지만, 사실은 각자를 위한 것이었을 뿐.




마음의 짐


언제 어느 때 한 번쯤은, 누군가로부터 베풂을 받길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배려나 베풂을 받는 것에서 당연한 경우는 없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연인 사이도 모두 마찬가지다. 당연한 일이라는 건, '1+1=2'와 같은 수식, '삼각형 내각의 총합은 180˚'와 같은 정리 혹은 정의에나 해당되는 것이지, 사람 간의 관계에서 '절대', '반드시'라는 건 없다. '마땅함' 정도는 기대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 의도야 어찌 되었든 무엇을 받을 수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베풂이나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건 기본적으로는 고마운 일이다.


주는 기쁨이란 게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베풂을 거절하지 않고 잘 받아주는 것이 오히려 주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될 수 있다. 간혹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어르신으로부터 용돈 같은 것을 받을 때에, "거 너무 거절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때의 어른들 말씀에는 이런 사람의 욕구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 있다.



그런데 작은 것이라도 받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받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짐이라고 생각하길 마련이다. 'Take and Give'라는 무언의 약속으로 받아들인다. 또는 마음속으로 저항감이 드는 상황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 나를 위한다며 무언가를 주는 것이 반복되거나, 관계의 친밀도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는 것을 받을 때 말이다. 또는 표면적인 이유보단 그 저의가 의심되는 상황도 있다.


잠깐 스쳐가는 관계에서는 상대의 베풂을 거절하지 않는 경우가 비교적 많은 것 같다. 더 이상 볼 게 아니기 때문에, 기분 좋게 받아주는 것은 내 이득을 챙길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일종의 선(善)을 행한 것으로 양측 모두 좋은 상태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빈번하게 마주치거나 지속되는 관계에서는, 앞서 말한 부담감을 무시하고 받기에는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굳이 내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잘 받아주어야만 할까?' 하며 무언가 나도 해줘야 되겠다는 사회적 압력을 계속 받는다. 이것은 상호 관계 속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필요한 것 혹은 그 정도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다. 누군가의 베풂을 받고 그 당사자 역시 그 수준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없거나 그렇지 않은 상황 또는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트레스의 연속이 된다. 혹자는 그냥 고맙게 잘 받아라고 하겠지만, 인지상정이라는 걸 염두에 두는 사람이라면 받고만 있는 게 힘들 수 있다. 마음의 짐과 함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마진(margin)


살다 보면 참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한다. 어떤 이가 누군가의 선물, 배려, 베풂을 받은 것에 감사를 표했는데, 감사의 표현을 받은 이가 화를 내는 경우도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정도를 해줬는데 너는 겨우 이 정도밖에 내게 안 돌려줬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도 있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주는 이가 얼마나 돌려받을 것이라는 것을 계산하고 주면서, 상대방에게 '내가 말은 안 해도 네가 이만큼 돌려줘야 해'라고 생각하고 강요하는 것은 조금 폭력적인 게 아닌가 싶다. 받는 이는 주는 이가 줬던 걸 그리 반기지도, 꼭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든 것에는 그것이 일어나야만 했을 이유가 반드시 있다. 그게 당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거나 내 인식의 지평 안에서 이해 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는 있을지 언정, 어떤 일이 일어나야 했을 이유는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남 몰라라 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자기희생을 행하기도 한다. 반대로 보이는 이 두 방향의 행위는, 그것이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를 이롭게 하느냐 그렇지 않냐의 노선 차이지, 결국 양 쪽 모두 각자의 만족을 위한 길을 나서는 것과 다름없다.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상황에 있다면, 내가 속한 곳이나 둘의 관계에서 자기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만족하고 끝을 내는 게 좋다. 얼마나 돌려받을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은 그냥 거래를 하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마진을 계속 떠올리고 그것이 내 만족도나 행복을 결정짓게 만든다. 거래를 하려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상대방에게도 이를 알리자. 그게 아니라면, 마진이 곧 행복이 되게끔 가만두지 말고 스스로가 행복 그 자체가 되자.


누구에게 받는다는 것은, 둘 사이 또는 둘이 지내고 있는 사회에서 서로를 보살피는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의 배려가 당연하지 않으므로, 여기에 기꺼이 감사한 마음을 가질 줄 알고 이를 표하자. 그렇지 않으면 거절을 하자.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여러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마는, 받고 나서 불만만 토로하지는 말자. 거절을 하고 싶은데 그러지 않았다면, 이후의 어떤 부담은 본인이 짊어져야지 그걸 남에게 내던지지 말자.





어쩌면, 세상엔 감사한 일로만 가득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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