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기
에어컨이 없으면 잠에 들기 쉽지 않을 무렵이었다. 매미의 울음보다 귀뚜라미의 찌르륵 소리가 더 많이 들리던 그날 밤은 편의점에 들러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금은 취한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고, 눈이 마주친 그는 이내 나를 불러 세웠다. 당시에는 저녁에도 한창 더울 때였는지라 그냥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를 무시하고 내 갈 길 가면 됐지만, 이때 나는 잠깐의 호기심에 빠졌다.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길 하려고 그러는 걸까?
가만히 떠올려보면, 이렇게 내 발걸음을 멈춘 적 있는 게 이번만은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도를 아십니까 부류의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나는 이들이 어떤 이야길 꺼낼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혹해서 데려가는지에 대한 그 프로세스나 시스템에 관심이 있었다. 나름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꺼내오시며 내게 이런저런 이야길 꺼내기 시작했다. 맥주는 냉동실에 딱 10 분 넣어두고 꺼내 마셔야 최고라든지, 자기가 어찌 살아왔고 자식은 어떻게 키웠는지, 대통령 탄핵이 어쨌는지 저쨌는지, 아버지가 어찌 살아가셨는지... 개인사나 시국에 대한 이야기로 그 순간들을 채웠다.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그의 이야기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지만, 당장에 집에 들어가야만 하는 급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지라, 그냥 흥미롭게 들어보기로 했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에,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방이 말을 꺼내는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의 현장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대화에서, 상대의 말에 무조건적인 동의는 건성건성 듣는 거라고 간주될 때가 많은 것 같다. 너무 반기를 들지 않는 표현으로 내 생각을 전하며, 상대의 말에 대한 반응을 보여야 그는 곧 이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고 있구나 하고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는 거다. 그러니까 들어주는 척이 아니라 상호 작용이 있는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게 중요했다.
이런 생각 아래서 반응이 적당히 오고 가는 중, 아저씨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서였다. 나는 그에 대한 이야길 듣고는 '진짜 쓸쓸하셨겠다. 얼마나 고독하셨겠습니까. 저도 그 마음 알겠습니다.' 이런 류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불현듯, 그건 거짓말이라시며 언성을 높이셨다. 네가 어찌 그 상황에 놓인 사람의 마음을 아느냐면서 남을 그렇게 안다고 말하는 것은 건방지다 라고 말씀하셨다.
자리를 뜰 때쯤의 아저씨는 오늘의 만남을 그냥 끝내려는 게 아쉬워 보였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졌지만, 위의 장면은 한동안 내 마음속에 잔상으로 남아 나를 툭-툭- 건드렸다.
상대방의 마음을 안다는 게 무엇일까. 이걸 이야기하려는 데엔 공감이라는 적당한 단어가 있다. 여기서는 감정에 무게를 좀 더 두고 다뤄볼까 한다.
공감 [共 함께/공손할/맞을/한가지 공 + 感 느낄/한할 감]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다른 이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그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상대가 겪고 있는 상황과 유사한 내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거기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 있다. 나도 이랬으니 너도 이렇겠구나 하고 말이다.
상대의 경험이 내게 없을 때는, 그가 처한 상황을 상상해보게 된다. 상상에는 시각적 이미지가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에, 아니 그게 거의 다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때 우리는 두 눈으로 직접 봤던 사건이나 연극, 드라마, 영화, TV 등에서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게 된다. 거기에서 내가 1인칭 주인공이 되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빙의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내가 그가 되어보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모든 건 짐작이라는 것이다. 내 과거의 경험에 빗대어 보든, 어떤 장면에 나를 대입해보든 관계없이 둘 모두 상대방과 내가 느낀 것이 100 % 동일한 지 알 수가 없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환경에서 지내왔으며, 어떤 관점과 맥락에서 눈 앞의 사건들을 바라볼 것인지는 당사자 말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린 모두가 서로 조금이라도 다른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이지 않는 한 결코 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비슷해 '보이는' 경우만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누군가가 어떤 현상 앞에서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을, 같은 조건일 수 없는 나는 더 작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공감이란 한편으로는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착각과 다름없는 것 같다. 너뿐만이 아니라는.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에는 당사자가 아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에게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크게 느껴 달라하는 것은 무리이자 자기가 위로받고 싶은 욕심이 과한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한다.' 이것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편의점 일화에서 아저씨가 버럭 화를 냈던 장면은, 타인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동시에 진실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그게 아니라 대충 얼버무리며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끼곤 배신감이 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잠깐 맡게 된 허울뿐인 자리였지만, 누군갈 상담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얄 때가 있었다. 나는 이에 대해 배운 게 없고, 관련 지식을 따로 접해본 적도 없었다.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중 연인 간의 문제로 고민 중이었던 한 선배의 이야길 듣게 되었을 때였다. 어찌 이야길 계속해서 이어나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들어보는 것이었다. 선배의 이야기를 듣곤 내 눈 앞에 닥친 문제라 생각하고, 섣부른 판단 없이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어보려 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그 선배는 나보고 당시 상담을 잘해줬다고 전했다. 나를 좋게 봐준 것은 고마웠지만, 잠깐 의문이 들었다. 당시에 난 들어준 것 혹은 들으려고 한 것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내가 한 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보니, 내가 접한 사례 중에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이 많을 때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한 게 아닌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것보다는 속 안에 쌓여만 있던 감정을 해소하는 게 필요한 듯 보였다. 대게 답은 본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에서 쌓여만 가는 감정을 푸는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건 효과적이다. 들어주는 이가 공감을 해주고 자기편이 되어줄 때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공감은 기본적으로 착각일 수밖에 없지만, 이 착각이 서로를 더 보살피고 돌아보는 관계로 만들어간다.
누군가에게 "불안감이 엄습해오네요"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활발하게 "무슨 말이에요? 불안할 게 뭐 있다고 그래요?"라고 대답하면 외롭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을 비웃어버리면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는 해학적인 기지와 함께 서로의 사고방식과 인류학적 관심을 나눌 기회를 앗겨버린다.
Alain de Botton, <우리는 사랑일까> 中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그렇기 때문에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매우 가까운 사이에서, 상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 나를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 내 감정의 크기와 상대의 반응의 크기가 같지 않을 때. 왠지 모를 낯선 모습에 서운할 때. 이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있고 내 입장을 생각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배신감이 되어 돌아오는 걸 맞이할 때가 있다.
그런데 누구든 서로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는 공감의 한계라는 걸 인지한다면, 이런 마음의 상처가 덜 생길 것이다. 내가 너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은 오만이 될 수밖에 없고, 네가 내 전부를 알아주라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서로를 모두 알 수 없기에, 매사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서로를 위한 관심과 노력에는 끝이란 게 없는 것 같다.
우린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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