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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Sep 30. 2017

두려움을 빨리 벗어나려는 자들

가장 간절할 나를 알기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추석이 곧이다. 꽤나 긴 연휴가 된 올해는 해외여행을 계획한 분들도 있겠고, 하루를 못 쉬고 일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이들도 많겠다. 요즘은 좁아지는 취업문, 짧아지는 정년 때문인지 공시생이 너무 많아졌다. 거기에다 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는 임금에 청년들이 삼포, 오포, 칠포 세대라는 신조어로 지칭되기도 한다. 정말 쉬운 게 없다.


명절이 되면 다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거나 성묘를 위한 벌초 등 몸을 바지런히 움직이는 데서 오는 힘듦과 스트레스도 있겠지만, 대게 관계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로함이 훨씬 클 것 같다. 이것 때문에 친인척을 마주하면 받을 질문세례를 피해서, 여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거다. 인터넷에 보니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연봉은 얼마냐, 둘 째는 언제 낳을 거냐 와 같은 질문들에 가격을 매겨놓은 게시글도 있었다. 이런 걸 물으려면 용돈이나 두둑이 달라며 아픔을 나름의 방식들로 승화시킨 것이다. 참, 웃프다. 웃픈 이들을 위한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볼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쯤 와 있냐를 가늠하고 싶을 때에 기준을 찾게 된다. 대게 그 기준이란, 해당 분야에 속한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평균적인 척도를 재는 것으로 정해 지거나 자신이 목표하고 있는 지점에 먼저 도달한 사람을 찾게 된다.


신의 지점을 확인하고 싶은 이유에는, 들인 노력에 비해 보상은 제대로 받고 싶다는 생각,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욕구 또는 뭐, 좋은 위치에서 누군가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부분 역시 없지 않게 있을 수 있겠다. 많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마는, 여기서 집중해서 다루고자 하는 건 '안정감'이다.




불안은 나를 너무 지치게 해


사람들은 자기가 안정적인 상태에 놓이는 걸 원한다. 이 말을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를 가져와서 풀어보면, 한 분야의 집단 전체 혹은 일부에서 낙오되거나 탈락되는, 일종의 분리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수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이용 가능한 자원이 많아지기에 그 집단 내에서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유리할 것이다. 평균적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행여 삶의 질이 우수한 집단에 비해 형편없을지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벗어나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지만, 그 이면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그것은 예고 없이 내 자리를 침습해오곤 한다. 이런 가운데 무리와 동떨어졌다는 생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마존 정글에 홀로 있다는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우리가 안정감을 찾아 나서는 이유가 된다.



잠깐 상상을 해보자.

야간에 조명등이 없는 산 길을 손전등 하나 없이 홀로 걷고 있다.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연인이 확신을 주지 않고 언젠가 날 버릴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준다.

10m 밖이 보이지 않는 심해의 잠수함 속

어떤 정책이 발표될지 몰라 뭔가 보류 중인 상태

공포 영화에서 추격자를 피해 손에 땀을 쥐며 숨 죽이고 있는 장면


이 외에 얼마든지 다양한 예가 있겠지만,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불분명한 것을 두려워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는 그 막막하고도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두려움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 우리를 소진시킨다. 아마 이런 상태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사람들은 이렇게 불안 속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를 줄이려고 하고, 안정감을 찾으려고 한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전략


불안, 두려움을 마주한 사람들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선택하는 전략은, 어둠의 장막을 걷어 내는 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의 요체가 '무슨 일'이었으니까, 그게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 정체를 알게 되면 대처를 할 수 있고, 대처를 할 수 없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긴장과 에너지를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 갑작스레 충격을 받기보단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한다.


'무슨 일'에 대한 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해당 분야에 대해서 알려고 한다. 예를 들면, 원자력 발전소가 지진에 어떤 영향을 받고 피해가 있을 것인지를 우리는 공부를 통해서 예상해 볼 수 있고 이에 대해 논의해 볼 수 있게 된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사람의 행동은 전후 사정을 알고 비로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저 으슥하고 음산해서 한 발을 내딛기 쉽지 않은 골목길 너머를, 거기에 설치된 CCTV 스마트폰으로 화면을 전송해준다면, 이를 보고 안심하고 갈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통계를 내어 평균을 따져보는 것이다. 평균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 집단에서 많은 부분이 여기에 해당되기에 안정적인 표본이 된다. 그래서 앞으로를 예상하는데 비교적 들어맞는 결과를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과목을 공부할 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참고서를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낮은 편이다.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것보다는 사람이 많거나 조명이 많은 대로변을 걷는 것이 통계상 범죄에 덜 노출될 확률이 높다 와 같은 것들이다.



이 과정들 속에서, 구체적인 것은 예상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대게 수치로 대변이 되는 이것에는, 점수, 연봉, 등락률, 계급이나 직급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수치를 앞세워 계량화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이것에는 이것, 저것에는 저것 하면서 Input과 Output이 명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찌 될 것인지를 더 확실히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믿는다라는 말이 더 맞겠다. 우리는 그렇게 미래를 확보했다는 믿음과 함께 안정감을 얻어낸다.


사람들은 이렇게 알려고 하는 것과 통계를 내어보는 두 가지 전략을 이용해서 미지의 것을 탐색하고 불안을 정복하고자 힘쓴다.




편하고 빠른 계산


흔히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고 한다. 왜냐면 이것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대할 때, 그것의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다양성을 인정 못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이런 진행은 언젠가 저항에 거세게 부딪히기 십상이다.


그런데 쉽지 않을 것 같다. 편견이나 선입견은 한편으론 빠른 계산과 같다. 통계에 대한 거다. '너는 이러이러했으니 이럴 거야.'와 같은 평가는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평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내 과거의 행적을 '안' 뒤에는, 내가 가진 조건을 계량화 하려는 시도를 하고는, 이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다른 '일반적인 사례'를 가져와서 나를 이해하려고 한 거다.


사람들이 내 모든 걸 이해하기 위해 온 신경을 쓰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일부 시도를 하더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전략을 쓰게 된 거다. 내가 어떤 하루를, 어떤 순간을 살아왔는지, 내 인생의 맥락을 진정 이해할 수 있는 이는 나 밖에 없다. 그러니까 편견을 가진다는 건, 사람들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 앞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를 줄이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게 편하니까.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날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 마!'라고 외쳤을 때에, 내 앞에서 그들은 알겠다며 내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예의상 혹은 내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속내는 에 대해 계산을 이미 끝냈을 거다. 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외쳤던 건, 겉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진정 그들이 날 그렇게 안 봤으면 하는 마음 아니었던가? 그런데 입 아프도록 외쳐도 사람들의 계산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들은 수월한 길을 따를 뿐이다.




그래도 그런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세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가장 쉬운 길은 사람들로부터 도망가는 거다. 이 길을 선택하면 당장에 홀가분함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도 잠시다. 이후로는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실망, 좌절과 같은 기분을 선사하며 안타까운 벌을 내리게 된다. 두 번째 길은, 내가 편견에 해당되는 예가 아니라는 걸 사람들 앞에서 몸소 증명해 보이는 거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고 어려운 길이다. 모든 사람이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효과는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그 시선들을 기꺼이 맞아내는 길이 있다.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를 무너뜨리는 정도까진 마음 쓰지 말자. 많은 사람들은 일반론을 들먹이는 것이었고, 내가 그러하다고 보였으니 그러하다고 평가했을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거다. 이 말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자는 게 아니다. 아픔을 같이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그 고통이 좀 덜해지는 면이 있지 않나.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더 적게 상처를 받기 위해서 '날 나쁘게 말하지 말아줘', '날 좋아해 줘' 라며 내 편을 꼭 찾으려는 수고로움을 선택하기보다는, 사람들은 원래 저러하다는 걸 이해한다면, 덜 아프고 더 다부진 각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도 나만큼이나 내 고민에 간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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