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노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을까?
스페인에 처음 와서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가 거리의 노인들이 젊은이들 못지않게 활기차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연말이 되면 젊은이들 못지 않게 잔뜩 차려입은 노부부들이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만끽하고 쇼핑도 즐기는 모습에 사뭇 놀랐다. 많은 스페인 국민들은 은퇴 이후에 국가 노인복지서비스청(IMSERSO, Instituto de Mayores y Servicios Sociales)이 제공하는 초저가 패키지 상품들을 통해 곳곳을 여행하며 노후를 만끽하고 있다.
스페인 국민들이 누리는 안락한 노후생활의 근간에는 국민연금이 있다. 스페인 국민들은 높은 수준의 자국 국민연금을 스페인 복지의 자랑거리 중 하나로 여긴다. OECD가 발표한 '2019 한눈에 알아보는 연금 보고서(Pension at a Glance 2019, OECD)'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연금의 평균 *순소득대체율(Net Pension Replacement Rate, 평균소득 근로자, 남성기준)은 83.4%로 OECD 평균(58.6%), EU28개국 평균(63.5%)을 크게 상회하며, 룩셈부프크,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등과 더불어 선두권에 위치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은퇴이전 100만원을 벌었던 사람이라면 은퇴 이후 대략 83.4만원 가량의 연금을 수령한다는 말이다. 은퇴 이후 지출수요가 감소하고, 의료도 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후생활을 유지하는데는 큰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라 볼 수 있다. 참고로 동 보고서 내에서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순소득대체율은 43.4%에 그쳤다. 아무래도 유럽 국가들에 비해 국민연금 제도의 역사도 짧고 미성숙한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놀러왔었던 한 스페인 친구가 으리으리한 고층빌딩 사이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의 모습과 낮은 국민연금 액수에 놀라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은퇴 이후 높은 수준의 국민연금 혜택을 누리기 위해 스페인 근로자, 고용주가 부담하는 공적연금 보험료율도 우리보다 훨씬 높다. 우리의 경우 근로자와 고용주가 공적연금 보험료로 각각 소득의 4.5%씩 부담하며 총 9%의 보험료를 납부하는데 반해 스페인은 무려 소득의 28.3%(근로자 4.7%, 고용주 23.6%)에 달하는 보험료를 낸다. 고용주가 부담하는 23.6%에 국민연금보험, 의료보험, 기타 사회보험 등이 다 포함되어 있어 정확한 국민연금보험료를 추출하여 비교하기 어려우나 OECD 평균 및 우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은퇴하기 전에 많이 내고, 은퇴 후에 낸 만큼 많이 받는 논리이다.
2020년 11월 스페인 일반 은퇴자의 평균 국민연금 수령액은 1,169유로였다. 월 평균 수령액이 5~60만원대인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이러한 국민연금제도를 기반으로 스페인 노령층은 국내 내수시장에서 탄탄한 구매력를 자랑한다. 거기다 노령인구 비율도 높아 스페인은 실버마켓을 노리는 국내기업들에 매력적인 진출시장으로 소개된다. 최근 스페인 경제가 많이 어려워져 청년 실업이 늘면서, 가족의 유일한 소득원이 국민연금인 가구도 증가하였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연금으로 한 식구가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여지껏 스페인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졌던 국민연금 시스템은 갈수록 버티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수년전부터 현 시스템의 지속운영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많은 전문가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연금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인구구조적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지출수요가 대폭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스페인도 전 세계에서 인구노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2019년 워싱턴 대학 보건계측평가연구소(IHME)는 2040년에 이르면 스페인이 일본, 싱가포르, 스위스 등을 제치고 평균 수명이 가장 긴 국가가 될 것으로 예측했고, OECD는 2050년 스페인의 생산연령인구(20-64세) 대비 노령인구(65세 이상) 비율은 78.8%로 일본(80.7%), 한국(78.8%)과 함께 세계 최고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스페인 독립회계위원회(Airef)와 스페인통계청(INE)는 2050년 전체 인구 중 30%가 65세 이상의 노령인구들로 채워질 것이라 전망하였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씽크탱크인 스페인저축은행연구소(FUNCAS)는 2019.1월 '노령화와 삶의 질' 이란 자체 보고서를 통해 현재 11 %인 GDP대비 국민연금지출 비중은 2050년까지 4~5%p가량 추가 상승할 것이라 추정했다. 반면, 2019년 Eurostat 기준 인구 천명당 출산인원은 7.6명으로 스페인은 EU에서 이탈리아 다음으로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였다.
스페인 자체 경제상황도 녹록찮다. 스페인 경제는 1986년 EU체제에 편입한 이후 2000년대 후반 경제위기를 맞이할 때까지 고도의 성장기를 누렸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느슨해진 이민법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중남미로부터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며 인구도 크게 늘었다. 이 당시 이들을 위한 주택수요 증가와 함께 건설붐이 일면서 부동산, 건설업이 2000년대 경제성장을 주도하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잘나가던 스페인도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부동산 버블은 붕괴되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한 때 50%에 육박했던 청년실업률은 지금도 그리스와 선두를 다투고 있다. 한창 일하면서 부지런히 세금도 내야하는 청년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국가 세수기반은 더욱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스페인 경제는 노동시장 개혁, 금융시장 개혁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거치며 최근 수년간 비교적 빠르게 회복하였으나 2020년 코로나 19로 또 다시 직격탄을 맞았다. 당분간 공공재정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스페인 사회보장제도 재정도 2011년도부터 적자를 내기 시작했고 적자폭은 계속해서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2019년 사회보장부문의 GDP 대비 재정적자는 1.4%로 전체 국가 재정적자의 상당부문을 차지하였다.(2019년 스페인 전체 GDP대비 재정적자는 2.7%) 2022~2023년을 기점으로 이른바 베이비 부머(baby boomer)세대들의 은퇴가 본격화되면 국민연금에 대한 지출 수요증가는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전망이다. 일명 연금 저금통(Hucha de la pensión)으로 불리며 비상금 성격으로 쌓아두었던 사회보장예비기금(Fondo de Reserva de la Seguridad Social)도 2011년 668억 유로로 정점에 달한 뒤 급격히 즐어들며 사실상 바닥을 드러냈다. 2018년 스페인 정부는 연말 국민연금 지급을 위해 사회보장예비기금에 30억 유로를 긴급 수혈하였다.
스페인 정부는 2020.4월 코로나 19 긴급경제대책으로 사회보장부문에 280억 유로의 신용지원을 하였으나 이 역시 빠르게 소진되었고 또 다시 연말 국민연금 지급을 위해 200억 유로 상당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2011년 집권한 마리아노 라호이(Mariano Rajoy) 국민당(PP)정권은 각종 구조개혁을 단행하면서 국민연금 개혁안도 발표하였다. 은퇴연령을 기존 65세에서 2027년까지 67세로 순차적으로 연장하고, 연금수령액 산정을 기존 은퇴 전 15년에서 2022년까지 25년으로 늘렸다. 또한, 2013년 스페인 정부는 연금재평가지수(Factor de Revalolización)와 연금지속가능성계수(Facot de Sostenibilidad)를 도입하였다. 연금재평가지수를 통해 매년 11월 기준 물가상승률(IPC) 대신 사회보장재정 세출입상황, 연금수령인원 변동상황을 고려하여 2014년부터 연금 인상률을 4년간 0.25%로 억제하였다. 첫 연금지급액 산정 시 기존 요인(납입기간 및 금액 등)에 신규 연금수급자들의 기대수명을 추가로 반영하기 위해 고안된 연금지속가능성계수는 2019년부터 적용키로 하였다.
스페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이후 수년간 인상률이 억제되자 결국 2018년들어 전국 각지의 노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스페인 북부를 중심으로 시작된 국민연금 인상시위는 전국으로 퍼졌다. 800만면이 넘는 국민연금 수령대상자들의 압박에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2018년 이후 집권하고 있는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 사회당(PSOE) 정부는 은퇴 인구가 구매력을 잃지 않도록 국민연금을 물가상승률에 연동하여 인상하였으며, 국민연금 개혁 당시 인상률 억제를 위해 도입하였던 연금재평가지수(índice de Revalorización) 대신 물가상승률(IPC)을 연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금지속가능성계수의 도입도 연기되었다.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0.9%의 인상률이 적용된다.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추진력이 약해지면서, 지출통제는 느슨해 지고 재정은 악화되고 있다.
현재 사회보장 재정건전성 회복과 국민연금 개혁은 스페인 경제가 해결해야할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EU도 현재의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 19로 국가의 경제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대대적인 국가경제 재건계획과 함께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 중앙은행(BDE)의 파블로 에르난데스 데 코스(Pablo Hernández de Cos) 총재는 2020.6월 의회에 출석하여 즉각 국민연금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은퇴를 앞둔 이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젊은세대들의 상황을 고려해 세대간의 균형을 맞춘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페인 국민연금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비롯한 주요 씽크 탱크들이 제안하는 주요 대책들은 다음과 같다.
은퇴연령 연장: 기대수명에 맞게 은퇴연령을 조금씩 연장하는 것으로 가장 큰 경제적 효과를 가져오는 방안이다. 독립회계위원회(Airef)는 실질은퇴연령 1년 연장 시 GDP대비 0.8%에 해당하는 액수를 절약할 수 있다며 실질 은퇴연령을 연장하거나 자발적인 조기은퇴를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2019년 OECD보고서에 따르면 스페인의 미래 은퇴연령(normal retirement age)은 65세로 덴마크(74), 에스토니아(71), 이탈리아(71) 등에 비해 크게 낮다. (스페인 정부가 2027년까지 은퇴연령을 67세까지 연장하였지만, 2027년 이후에도 국민연금 보험료 납입기간 38.5년을 채운 인원은 풀(full) 연금을 받고 65세에 은퇴할 수 있기 때문에 OECD 기준에 따른 은퇴연령은 65세)
국민연금 자동조정 매커니즘 도입: 국민연금 시스템 안정을 위해 인구구조 및 경제적 상황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정되는 매커니즘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과 같은 국가는 국민연금 및 은퇴연령을 기대수명과 연동시키는 매커니즘을 이미 도입하였다.
국민연금 운영에 대한 투명성 강화: 개개인이 본인의 언제든 노후준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근로자 본인이 원하는 수준의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자연스럽게 은퇴연령을 연장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이다.
민간연금 활성화: 개인저축을 장려하고 민간 개인연금을 활성화하여 국민연금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방안이다. 네덜란드, 영국 등과 같은 다른 여러 국가들의 경우 민간 개인연금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는 반면 스페인은 국민연금에 대한 의존이 절대적이다. OECD 국가들의 GDP대비 민간연금기금 규모가 50%대인데 반해 스페인은 10%에도 채 못 미칠정도로 민간 개인연금에 대한 관심이 낮다.또한, 2020 Eurostat이 발표한 구각별 가계저축률 통계에 따르면, 스페인의 2018년 가계 가처분 소득대비 저축률은 5.9%로 EU 평균 10.4%의 절반을 조금 상회하였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준비가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연금지급액 계산 산정연수 연장: 앞서 말한대로 스페인 정부는 2011년 연금개혁을 통해 국민연금 산정연수를 기존 15년에서 2022년까지 점진적으로 25년으로 연장한 바 있다. 국민연금의 지급액을 산정할 때 최근 15년이 아닌 25년간의 소득액을 기준으로 산정함으로써 국민연금 지급액 수준을 낮출 수 있고, 결과적으로 현재 세계 최고수준의 소득대체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독립회계위원회(Airef)는 25년보다 더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령인구 노동시장 참여 활성화: 스페인은 노령인구의 노동참여가 낮은 편이다. 2020.1월 Credit Suisse사가 발표한 Rethinking retirement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스페인 65세 이상 인구의 노동활동참가 비중은 2.1%로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았다. 또한, 연금수령에 필요한 근로연수를 채운 이들의 근로연장에 대한 인센티브도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떨어진다. 연금수령자가 일을 하게 될 경우 이들의 연금을 50% 삭감(1명 이상을 고용하거나 최저임근 미만으로 벌 경우 제외) 하고, 8%의 특별 연금세를 납입함에도 추가적인 연금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연금 수령기간을 년씩 연기할 때마다 붙는 수령액 상승률도 연5.4%로 OECD 평균인 7.7%에 비해 낮아 수급연기에 대한 인센티브도 낮은 편이다.
다른 선진국의 국민연금모델 도입이 모색되고 있는데 공적연금, 직장연금, 개인연금의 3축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국, 네덜란드 또는 *명목확정기여방식(NDC)의 스웨덴식 모델 등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명목확정기여방식(Notional Defined Contribution)
스웨덴을 비롯한 몇 몇 유럽국가에서 재정안정화를 위해 도입한 공적연금의 재정방식으로 기본 개념은 자신이 지출한 총보험료를 자신이 사망할때까지 나누어 받는 것으로 일반적인 사적 종신연금과 같은 개념임. 개인마다 자신의 계정이 설치되고 납입한 보험료가 자신의 계정에 기록되는데 이러한 개인 계정은 가상의 계정이고 실제로는 퇴직자들에게 지급됨. 가상의 자산을 연금화하여 급여액을 정할 때 기대수명의 변화에 따라 급여액을 조정하는 자동조정장치를 사용함. 연금액 결정 시 기대수명, 퇴직시점, 추정된 경제성장률 등이 함께 고려됨. / 출처: '소득재분배 기능이 추가된 명목확정기여 방식의 적용에 대한 검토' 보험연구원 최장훈 연구위원 /
국민연금은 노령인구의 생존과 세대간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스페인 정부도 개혁의 필요성을 진작에 인지하였음에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현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해진만큼 문제를 더 키우기 전에 빠른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빠르게 노령화 사회로 달려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역시 국민연금은 중요한 경제이슈이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스페인의 국민연금 시스템이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지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el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