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캔버슬릭 Jun 24. 2020

통찰력에 관하여

통찰력

아주 작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직관적인 해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사실적인 사람이다. 사건의 발생과 사물의 변화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난 이들을 하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옆 동네에 놀러 가 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와는 다른 새로운 곳이며 진기한 문명과 지식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좁은 곳이 아니라 더 넓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을 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아주 넓으며 무수히 많은 지식과 역사가 존재함을 깨닫고 더 넓은 곳, 먼 곳을 찾아다니며 서로 다름을 구분하며 세상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들은 새로움에 갈망하며 더 많은 지식과 역사를 관찰하고자 한다. 나는 이들을 셋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과 진실은 현실에서 매우 차이가 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치고 지긋이 응시하는 것은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은 누구나 인지 가능한 상태에서 발생한다. 그렇게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는 진실을 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세계, 경험, 판단력 등에 의해 생성되는 하나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일 이유는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서 하나의 진정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진정한 진실에 도달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사람과 둘, 셋의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본 객관적인 사실에 기인하여 자신만의 개인적인 진실을 생성했다. 한 개인이 만든 각각의 진실은 서로 근거가 되어 커다란 하나의 진실로 변해가며 이를 뒷받침해줄 객관적인 사실을 더 보충한다. 그렇게 그 사람은 하나의 시각을 가진다. 넓고 오래된 세계를 바라보는 그 사람만의 시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마다 개인의 경험과 판단을 통해 집대성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라면 양육자나 타인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면서 좋고 나쁨을 배우고 비교를 통해서 그 시각이 제각각 다르게 만들어진다. 그러한 시각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판단의 가치로 사용된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매번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용된다. 이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외부 영향의 반영도 스스로가 판단한다. 누군가는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른 행동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은 개인의 도덕적 잣대나 양심을 반영하는 기준일 수 있고 무엇이 중요한지 어떠한 사건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의 판단의 기준일 수 있다.

통찰력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통찰력과 가치관의 차이는 동일 선상에서 얻어지는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서 개인적인 진실을 얻어내는 과정을 비슷하나 그 사용의 쓰임이 상이하다. 가치관은 이미 생성된 진실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로 이용하는 반면에 통찰력은 받아들인 사실을 통해서 보다 객관적인 진실을 이끌어내는데 더 집중한. 통찰은 현실 세계의 아주 복잡한 이해관계를 설명한다. a의 사건과 b사건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c의 사건 또한 연관성이 없다.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기에 이 사건들을 개별적인 사건으로 분류한다. 통찰력은 여기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또 비판하면서 새로운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 통찰력을 가졌다는 것은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들 사이에서 일어난 진실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다수의 사건들간의 영향력과 연관성을 찾고 파급되는 효과를 기대해 본다. 1의 회사가 부도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연 매출100억 규모의 회사이다. 자금 흐름이 원할하지 않아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지만 수가 없어 피할 수 없었나보다. 이 사건은 하나의 사실로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해 보인다. 상환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매출이 떨어져서 이익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일부 자금을 상환했지만 나머지는 만기일을 지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이 시점에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매출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줄어든 것은 사실이며 명확하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경기가 안좋아서 사업에 어려움이 있었던거 같다고 말이다. 몇가지 사실을 통해서 사업의 어려움을 도출했다. 그게 진실이라고 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우린 이러한 사실만을 가지고 진실을 만들고 받아들인다. 이처럼 몇가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이라고 생각할 만한 정보를 만들수 있다. 부도, 매출하락, 경기침체 등의 사실은 한 회사에 일어난 일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래서 이제 더 볼 것도 없다. 수축기에 경기침체는 회사의 부도라는 연관성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사실 이 회사는 아주 건실한 회사다. 당좌거래 정지 공시도 되지 않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부도라면 끝난건데 건실한 회사는 또 무슨 이야기냐고 말이다. 매출이 안정적이다가도 매출이 하락하는 건 흔한 일이다. 100억 매출이 몇년사이에 500억 매출도 가능하고 10억 매출도 가능하다. 단순히 몇가지 사실만 가지고 예단하는 것은 진정한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이해를 위해서는 매출의 하락이 얼마나 지속적인가를 따져봐야 함을 알고 있어야하며 만기 채권의 규모가 얼마나 컷는가 왜 현금이 없었는가 등의 다양한 분석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회사는 인수합병에 무리한 투자를 하면서 단기에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이 줄어들어 만기를 넘겨버린 경우이다. 저가평가된 회사를 싼 값에 인수해 더 넓은 사업분야를 꿈꿨던 것이다. 돌아오는 만기를 연장하면서 까지 인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밀어붙였지만 결국 부족한 지분율로는 이사회를 장악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분야에 경험이 존재해야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것 같다. 물론 그렇다. 그 경험이라는 것은 수 많은 사실을 접하고 예상하면서 맞고 틀리고를 반복하면서 숨겨진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진실을 통해서 숨겨진 이야기를 예측하고 예상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통찰력은 몇가지 사실을 통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할때 통찰력의 내공이 높은 사람은 그 해석에서 새롭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진실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더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통찰력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회사의 부도를 이야기했다. 부도라는 사건으로 바라볼 때 통찰력이 있고 없거나  또는 뛰어나거나 그렇지 않다는 건 어떤 뜻일까. 먼저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어느 범위까지 떠오르는지 생각해보자. 하나의 사건으로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사실로 떠오르는 범위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내용부터 전혀 연관이 없을것 같은 내용까지 떠올릴 수 있다. 부도는 실직, 매출, 사장, 직원, 경기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직관적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내용들일 수 있다. 다른 이는 재고, 경쟁사, 매출, 회생, 주거래은행 등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유럽, 금리, 저성장, 환율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아주 짧은 단어로만 표현해서 느껴지는 감정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사람마다 접근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이익에 따라서,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사회적 이슈에 의해서 그 순간마다 접근 방향성이 달라진다. 일종의 경험의 프레임이자 생각의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통찰력은 하나의 사실을 바라보면서 그 사실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가를 고민해봐야한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알고 있는 지식들과 경험들을 통해서 어떠한 사실로부터 분기되어 왔는지 알아내는 것이야 말로 진실로 가는 길이 되는것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이 보는 세상과 초등학생인 아이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 경험의 차이가 절대적으로 발생한다. 이 차이는 지식과 경험의 정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먼저 지식과 경험을 분리해서 생각해보자. 단순화하면 지식은 정적인 정보이며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지식들과 합쳐지면서 지식이 사용되어지는 분야나 적절한 시기, 영향력 등 실제 그 지식의 의미를 깨달으며 쌓인 정보이다. 초등학생의 경험의 정도와 노인의 경험의 정도는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지식이 경험이 되고 경험에 지식이 더해져 또 다시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통찰력을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다양한 사건을 좀 더 가까운 진실로 바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등학생이 진실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노인보다 더 잘 볼 수 있다. 최근 아이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 노인은 자신의 유년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예측하여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통찰력은 호기심이 많고, 이유가 궁금하며, 경험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힘일 지도 모른다. 사소하거나 중대하지 않더라도 그 사소함을 꿰뚤어서 정확한 진실을 보는 것은 아주 높은 통찰력을 가진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생각해보자. 세상은 흐름이 존재한다. 시시각각 변화되며 하나의 사건이 파급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과거는 흘러서 변해왔고 현재는 변화의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미래는 흘러갈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서서 과거도 보고 미래도 생각한다. 때로는 지금 현재 일어난 일들을 고민하기도 한다. 대학을 예로 들어보자.

첫번째 사회적 분위기의 차원을 1이라 하자. 국민으로서 초중고 교육을 받는 것은 의무이다. 누구라도 대부분 보편적인 교육을 받게 된다. 이후 그들은 각자의 삶이 돈에 의해서 벌어지게 된다. 대학을  자와 가지 못한자. 사회는 이분법적으로 둘을 나누어두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대학을 가야 많은 돈을 벌수 있다고 말이다. 대학은  인생의 승패와 다름없이 여겨지고  죽어도 가야한다. 좋은 직장을 위해 가야하는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은  우위를 점해야함이다. 그것은  시대에 태어나서 그냥 보고 느끼는 현상 그대로이다.

 다음 2 차원은 시대이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60년대이다. 전쟁 이후에 태어난 부모는 평화를 맞이했고 먹고사는 문제에 봉착하였고 국가는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어렵고 힘든 일자리가 대부분이고  수입은 적었다.  부모들은 전쟁보다 안정된 시기였으며 많은 아이를 낳았다.  시기에 공부 잘해서 엄청난 부를 가진자가 늘어났고 그를  부모는 공부에 희망을 걸어 자식만큼은 대학을 보내려 노력했다. 대학은  성공이였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흘러 국민은 부가 늘어나고 안정을 찾았으며 누구라도 대학을 가게 되었다. 최근에는  많은 인원을 기업들이 수용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

다음은 3 차원인 국가이다. 일본의 대외전쟁으로 발생한 국가적인 재정 위기를 제국주의로 해결하려하였고 결국 일본의 희생량이 되었다. 식량에서부터 모든것이 일본의 안정을 위해 빼앗기고 이용당했다. 식민지는 일본이 2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벗어나게 되지만 얼마 못가서 정치적 경제적 이념차이는 다시 6.25전쟁으로 번져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이러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염려하던 미국에 의해 다시 평화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미국의 보호 아래 국가 발전에 전력을    있었다.  이후 국가는  많은 산업분야에서 기업 성장을 도와주고  기업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를 생산했다. 공교육은 최고의 교육과정이 되고 대학은 최고의 훈장이되어 국가 발전에  기여를 했다. 최근 내수침체에 수출부진으로 기업은 수많은 대학 졸업자들을 감당할  없는 상황이 되었다.

4 차원은 세계정세다. 세계대전으로 부를 쌓은 미국이 영국의 패권을 넘겨받고 소련과는 냉전시대를 보내는 시기이다. 다양한 경쟁에서 이념적 차이는 중요한 부분이다.  시기에 북한의 이념은 미국이 염려하던 이념이였고 이를 도우던 중국도 같은 이념이였다. 이미 미국은 공산화의 확산을 동유럽에서 느꼈고 동아시아에서의 이념확장은 미국으로써는 안될 일이였다. 동북아의 평화는 우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중대한 가치인 것이다.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냉전시대의 수혜자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보호는 국가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대외적 신용도는 물론 미국의 일부 시스템과 신자유주의까지 받아들이며 좋은 날을 보냈다. 그런 환경에 대학이 필요했고 대학은 많은 노동자를 생산했다.


대학이라는 하나의 객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 지식과 경험에 의해서 다르게 보인다. 대학이라는 하나의 객체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수많은 이유와 결정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대학 왜 만들어서 이렇게 경쟁을 하게 만드냐고 물을 수 있으나 필요에 의해 세워졌고 다른 이유에 의해서 사라지고 있다. 통찰력은 단순히 대학에 관해 이해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확장 또는 응용이다. 대학의 문제는 인구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 지역사회에도 관련이 있으며, 대학 주변의 상권의 영향을 준다.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이해하는 것부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의 새로운 관점인 공교육을 보자. 대학을 공교육의 하나로 본다면 공교육은 왜 필요한지 어떻게해서 시작되었는지 이해를 하는 사람과 원래부터 있던 대학이고 그냥 다니던 공교육이라 궁금증이 없던 사람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앞으로의 방향성을 예측하거나 현재의 대학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차이가 날 것이다. 인구가 감소하고 취업이 어려우니 당연히 대학은 이제 꼭 필요한게 아니라는 인식이 퍼저가서 나중에는 대학을 안가는 사람도 많을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캐나다의 교육체계를 이해하며 유럽의 대학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알고 있는 사람은 분명 다른 분석을 할 것이다. 적어도 전문학사와 학사의 차이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잘 알것이다. 그러나 캐나다는 컬리지와 유니버스티의 차이는 학구열에 대한 분류로 시작되고 자신의 삶의  방향성 선택으로 결정된다. 사회적 정책, 문화, 관습이 다르다보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우리의 변화가 그들의 모습에서 닮아가는 부분이 생기게 될때 어떤 방향으로 대학의 인식이 변할 수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다른 나라들은 공교육이 일찍 시작되었으며 그들도 다양한 사건들을 부딪히면서 그 시대에 맞는 정책이나 인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의 변화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은 각자가 다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확한 경계없이 존재한다. 그동안 배워서 알고 있는것이 곧 지식이고 때론 그 지식이 경험으로도 존재할 것이기때문에 나누어 보기에는 쉽지 않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알게되거나 타인에게 들었던 이야기, 책을 통해서 알게된 내용들이 모든 것들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머리속에서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배합된다. 개인의 가치관이 참여하고 본능과 경험이 자리잡아서 각각의 정보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져가며 자신만의 커다란 지식으로 자리잡는다. 자리잡은 지식들은 그 성질에 따라서 큰 덩어리로 있기도 하며 아주 작은 원소로 존재하기도 한다. 즉, 서로 연관성이 있는 정보들끼리 결합되고 서로 연관성없는 정보들은 각자의 성향에 맞게 근접해 있거나 완전 별개로 흝어져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닌다. 여기에 경험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지식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 가볍게 넘겼던 사소한 이야기들이 직접 경험하게 되면 오래전 들었던 지식들이 더욱 진하게 다가오며 그 지식은 더욱 더 진하고 단단하게 표현해내기 시작한다. 나의 경험 속에 정보들을 그 희미한 정보들과 결합하여 연관성을 가지고 곧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바뀌는 것이다. 타인의 경험도 희미한채로 머리에 담겨있다가 곧 색이 바뀌고 중요하게 남게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가면 더욱 많은 지식이 쌓이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쌓은 지식이나 경험들, 여가를 즐기며 축적해 온 것들 그리고 서적을 통해서 지식을 쌓은 것들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유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낚시는 부질없는 행위로 편재되어있을 수 있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 되는 부분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각각의 지식 경험들은 같을 수 없으며 같은 지식일지라도 이를 받아들일때 적용되는 가치관에 따라서 자리잡는 부분이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앞서 말했듯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잣대로 그 사건을 판단할지도 개인이 선택한다. 머리속에 그 사건은 특정 덩어리에 할당되어 그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서 그 틈에 잘 조화되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그 사건은 머리속에 하나의 기준이 잡히고 이후부터 그 덩어리로 부터 다양한 생각을 만들어 낸다. 가령 금전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결혼 앞둔 연인이 로망과 현실의 저울질에서 서로 대립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 각각의 삶에서 결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각자의 덩어리를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은 충분히 서로의 덩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갈등과 분노만 쌓여가고 어느 한쪽이 더 큰 목적을 위하는 것이 좋다는 가치관을 통해서 포기를 하게 된다면 이 상황은 종료가 될 것이다. 결혼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각자가 가지는 세상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늬앙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서로 목적과 과정을 다르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만들어 둔 세상의 모습에서 진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객관적인 사실을 얻어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으나 이를 통해서 진실을 찾아내려고 할때 사람마다 그 노력의 정도가 많이 차이가 난다. 한두가지의 이야기로 하나의 큰 이론을 만들어 스스로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 한두가지의 사실은 부족해서 다양한 사실들을 찾아내고 대부분의 사실들이 하나의 진실을 가르키고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서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을 하고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더 다양한 상황과 순간들을 찾아내서 모든 상황에도 그러함이 맞다고 판단될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라 한다. 모든 것을 주는대로 보이는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때 누구라도 쉽게 납득을 할 수 있는 상태까지 만들어서 그것이 변할 가능성이 낮은 상태로 만들어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진정한 진실됨으로 나아간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실을 도달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태도이다.


결국 통찰력은 비판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자신만의 생각을 다지고 또 다져야 높아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삶을 살아간다. 먹고 울고 자면서 생체리듬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기 위해 타인의 습관이나 관습들을 본능적으로 익혀나간다. 그리고 기성세대의 열망과 희망사항으로 우리들은 세상으로 밀려나가게 된다. 세상을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적어도 하나의 삶의 무기를 만들어 주려는 기성세대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는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적어도 학교는 졸업해야하고,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쌓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들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키는대로 알려주는대로 행동하며 살게 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할 이유와 원인은 제쳐두고 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에 흥미와 호기심에 가득찬 채로 살아간다. 비판적 사고가 습관화 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흐름에서 뒤쳐지거나 방황하며 오랜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다. 스스로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서 무엇이 옮고 그른지에 대한 가치관이 생성되는 나이가 되면 모든 것들을 다 검증할 필요가 있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려고 수 없이 노력할 테니 말이다. 또래는 한끗 차이의 지식을 더 쌓아서 더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옮고 그름의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판단 기준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내세울 수 있다. 오래동안 고민해보고 생각하면서 그 분야에 대해 수 많은 지식들과 경험이 쌓여가는 것이다.


통찰력은 앞으로의 흐름이나 다가올 미래의 결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책이나 신문 또는 매스컴에서 통찰력이라는 단어 사용의 대부분이 미래에 대한 흐름이나 결과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을 알수 있다. 통찰력을 가진 자가 경제 흐름을 잘 분석하여 미래 산업의 가치를 미리 선점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높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율주행계가 새로운 시장의 흐름이라고 판단되어 관련 회사들과 관련 제조사의 지분들을 늘려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어느 일본의 회사나 특정 에너지가 미래에 많은 산업분야에서 사용되어 질거라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는 지금 시점에서 20년전에 상용화를 위해서 개발TF를 만들어 달려왔던 한 회사는 지금도 널리 사용하지 않는 에너지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10년 후 에너지 시장의 지각이 변화할때를 위해 아직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어느 회사처럼 역사적 심리적 환경적 요인을 고려해 준비는 사람이다. 즉,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를 생각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더하여 자신만의 통찰력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통찰력을 사업가들은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미래에 가치를 미리 선점할 수 있는 판단과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거 지향적인 통찰력이 무엇일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은 몇가지의 대이론에서 뻗어나와 각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증명이나 합의로써 공식화되어있다. 수 많은 표편화 된 지식이나 이론들 가운데 가끔 저명한 학자가 같은 역사적 지식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에 사람들은 감탄을 하며 그 사람을 놀라운 통찰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사피엔스'의 작가인 유발 하라리처럼 말이다. 과거의 인류에 대한 인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착화되어 공교육을 통해서 널리 전파되어왔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이론으로 모두가 그렇게 믿고 또한 의심하지 않았던 이론이다. 그러한 이론에 반기를 들고 나온 새로운 이야기가 너무나도 타당해보이고 새롭고 놀라움을 느낄때 우리는 과거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현재의 이론들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생기게 되는 곳이다. 총균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역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명한 학자들의 아주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이론을 아주 굳게 믿는다.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흠이 없는 이론이거나 슈퍼스타 학자의 명예로 인해서 다른 명제들은 묻혀져서 세상에 나오지 못할 수 있지만 대부분 하나의 이론을 선택하고 모두에게 교육해야 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속에서 우리는 암묵적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두 작가는 그들만의 분야에서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지금의 현재를 다시 만들어 냈다. 미래를 위한 통찰력과 현재를 위한 통찰력은 서로가 그 사용 목적이 다르지만 우리는 그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나 미래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항상 이해관계 속에서 항상 고민을 한다. 행동에 대한 그 결과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공평한 결정은 없으며 누군가가 더 좋다면 다른 누군가는 그에 준하는 좋지 않음이 발생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끊임없이 적용하여 나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을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고 한다. 통찰력은 그 속에서 나에게 가장 큰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커다란 시각을 제공해 준다. 수 많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가장 큰 이익 또는 반사이익이 무엇인지 선택하게 만들며 비록 지금은 나에게 적은 효용과 높은 비용이 발생하지만 미래 특정 시점에서 가져올 최대의 이익을 위해서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떠한 체계를 기반으로 구성되어있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의 가치관이 얼마나 현명하게 생성되어있는지에 따라서 한 개인의 인간관계가 결정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높은 통찰력을 가졌는지에 따라서 무엇이 나의 인생인지 무엇이 나를 온전히 나로써 존재하게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삶의 가치있는 무기인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