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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딩하는 수학쌤 Apr 22. 2023

탁월함과 능숙함의 사이 어딘가

중간고사 특집?

수학과 학부생 때 멋진 헤어스타일의 박형주 교수님이 교환 교수로 오셨다. 당시 우리는 교수님을 Allen Park이라고 불렀는데 수업이나 강연을 들었던 친구들마다 엄지 척을 했다. 전공 수학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지금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찬데 어떻게 다른 수업을 또 듣나 싶어서 그냥 Pass를 하려다가.. 친구들이 방학 중에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같이 Topology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박형주 교수님이 아주대로 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 학회나 강연에서 뵐 때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페북으로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재미있는 글을 하나 올리셨다.



프랑스 파리 인근의 사클레이에 있는 프랑스 고등과학원(IHES)에서 만난 Hugo Duminil-Copin 교수. 작년에 필즈메달을 받은 그는 확률론과 상전이 현상을 연구하며 수학과 물리학을 넘나드는 학자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과 IHES에 교수직을 가지고 있어서 자주 오가는데, 이번 주엔 프랑스에 와있었다.  최근에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를 풀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빵점을 맞았다고 했다. 자기는 문제를 빨리 푸는 것엔 젬병이라며... 유쾌한 사람. (박형주 교수님 Facebook)


엌ㅋㅋㅋㅋㅋ 필즈 메달 리스트지만 올림피아드 수학 문제 빵점..ㅋㅋ  


 문제 빨리 푸는 것에 젬병이라는데, 사실 나도 마찬가지.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자신없어 하는 부분이지.


 중간고사 기간 동안 불안함, 성적이 잘 안 나와서 고민인 학생들 중 공부가 싫어서 자세가 배배 꼬이는 학생들을 위해 잠시 추억의 옛날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포스텍 수학과 3학년 시절, 학창 시절 가장 낮은 학점에서 비실대고 있었다. (학사 경고까지 가진 않았으나.. 마치 비행기가 땅에 닳을랑 말랑하는 것처럼 그 경계에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하고 있었다.) 전공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던 시절이라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나름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제법 했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와보니 나는 평범하다 못해 수학을 잘 못하는 환경에 처해졌다.


'난 참 별 볼일 없는 사람이구나.'라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은 상대적이라고,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워낙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니까 내가 가진 장점 따위는 하늘로 날려버린 지 오래였다.


수학과 시절 잠시 스쳤던 Zelmanov & 박형주 교수님. (The 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2014)


그렇게 대학 3년을 수학으로 비실대다가 겨울이 다가왔을 때 필즈 메달 리스트였던 Zelmanov 교수님이 강의를 하러 포항에 오셨다. 당시 학부생도 들을 수 있는 강의를 쉬운 영어로 하신다고 하셔서 친구들과 갔지만 강의는 처음 5분 정도의 인사 멘트만 알아들었을 뿐 60분 내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주로 질문을 하는 분들은 교수님들이었고, 나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더욱 가졌다.


'난 수학을 대학원에서 전공하진 않을 거야! 내 능력 밖이야!'





싸이월드 뒤져서 찾아낸 학부생 때 사진.. 눈썹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고 있는 느낌. -_-;


그렇게 결심하고 수학에 대한 미련을 접으려던 마음을 가지던 때..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가 교수님이 Zelmanov 교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 아니, 우리 교수님이 저렇게 영어를 잘하시는 분이셨나? 생각해 보니 박사 학위를 다 미국에서 받으셨는데 영어를 못할 리가 없지.


 그 모습이 신기해서 친구 3명과 힐끗힐끗 문틈으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우리를 발견한 교수님이 들어오라고 하셨다. 와, 세상에. 필즈 메달 리스트와의 대화라니. 만약 허준이 교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수학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은 수학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던졌다. 그때마다 교수님들은 '우린 이런 학생들을 가르쳐.'라는 표정으로 흐뭇해하셨고, Zelmanov 교수님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답을 하셨다. 어쩌다 어쩌다 내가 질문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이 주어졌고.. 난 수학이 너무 힘들어서

 

 "혹시.. 수학 공부하다가 '내가 정말 바보 같아.'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라고 질문을 던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교수님들은 뭔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셨다가 금세 표정이 돌아오셨다. 그렇게 세계적인 석학에게 돌직구를 날렸는데.. Zelmanov 교수님은 진지하게 내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당연하지. 난 정말 평범한 사람이야.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자네는 수학 공부를 하며 어려운 순간이 많은가 보군! 나랑 똑같은데?" (기억나는 의미로 그냥 한국말로 씁니다.)


 순간 정적의 분위기는 웃음이 가득한 순간으로 바뀌었다. 세상에. 필즈메달 리스트가 나랑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니. 용기를 좀 더 내서 한 마디를 더 했다.


 "전 위상수학, 대수학 등 기초 과목도 무척 어려워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맞아. 그 과목들을 처음 배울 때 어려움을 충분히 겪을 수 있어. 어려울 때마다 교재를 반복해서 읽어봐. 어느 순간 돌파구( breakthrough)를 발견할 때가 올 텐데, 그때까지는 책을 계속 읽고 생각해야 해."


 짧다면 짧은 그 순간이 나에겐 한 줄기 빛이었다. 시험 문제를 잘 못 풀었고, 그 때문에 난 수학을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학을 떠나려던 결심을 했었지만.. 성적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사실 이 사진은 이산수학 과제할 때 사진..;


그 이후 드라마틱한 변화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대로 졸업했다가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겨울방학 때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방학 때 내가 학부 때 가장 이해를 못 했던 전공 과목을 다시 공부하기로.


 그렇게 그 겨울방학은 내 인생을 바꿔놨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닌, 꺾여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혼자 고독하게 책을 보며 증명을 해보려 노력하던 순간 우연한 타이밍에 그 breakthrough가 찾아왔다. 막힌 물꼬가 트이자 흐름이 드디어 잡혔다. 마치 산길 속에서 헤매다가 등산로를 겨우 다시 찾은 것 같은..


 이후 단순히 점수를 잘 받기 위한 노력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때로는 내용을 탁월하게 알아가다보면 능숙하게 문제를 풀수 있기도 하고, 문제를 풀다가 원리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능숙함과 탁월함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다르다. 어떤 사람은 탁월함에서 매우 우수하지만 능숙함은 떨어진다. 심지어 필즈 메달을 받은 분도 그럴 수 있지. 수능 문제를 허준이 교수님과 일타 강사 한 명이 풀어보라면 당연 강사가 더 잘하겠지. 그러나 수학에 대한 깊이는 교수님의 전문 분야다. 각자가 하는 일이 다르고, 각자 잘하는 것이 다르다. 어느 분야든 자신이 매료될 수 있는 부분을 잘 찾아가면 좋겠다.


 탁월함은 평소 깊은 고민과 많은 시간을 통해 완성이 된다. 반면 능숙함은 단기적이지만 효과적이다. 능숙함이 탁월함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탁월함은 능숙함에 부스터를 달아준다. 둘 다 잘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늘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 수학과를 떠나 수학 교사가 되었다. 처음엔 오랜 시간 공부했던 수학과를 떠난다는 게 허탈하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가치를 느끼고 내가 잘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안에는 인공지능 교육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 그 분야를 붙잡고 있다 보니 다른 분야는 약하다. 그러나 못하는 것보단 잘하는 일에 더 집중하며 탁월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욕심을 내다가 방향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결론은.

 하나를 못한다고 자존감을 너무 내려놓지는 말자. 뭐든 자기가 잘 못하는 게 더 크게 보일 뿐.


 뭔가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나도 늘 새로운 도전을 해보지만 대부분 실패가 우르르 따른다. 다만 실패가 주는 성공의 힌트를 잘 발견해야 한다. 그러면 실패는 망한 게 아니라, 마치 잘 안된 부분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 될 수 있다. 그 순간이 breakthrough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오늘도 외쳐봅니다.


Keep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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