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을 다룬 '레 미제라블'을 통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
이야기는 대학 신입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개팅에 술집에 당구장에 온통 놀자판으로 한 학기를 보내고 오랜만에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과선배를 만났다. 1학기 때는 방향이 같아서 집에 종종 같이 가곤 했던 사이다. 2학기가 돼서 친한 친구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졸업반인 선배랑 같이 다닐 기회가 없었는데 학기가 끝날 무렵 집에 가는 길에 만난 것이다. 그리고는 헤어지기 아쉬워 맥주 한잔 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선배는 불쑥 읽어보라고 책을 하나 줬다.
제목도 무시무시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80년대의 끝 학번인 그 형과 90년대 초 학번인 우리는 나이로는 두 살 차이였다. 학교를 늦게 들어간 탓이다. 그래서 공통점이 참 많았다. 둘 다 오락실을 좋아했고, 오락실 다음으로는 책도 좋아했다. 그런 선배와 나에게도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바로 마르크스였다. 80년대 학번에 마르크스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상징이요 우상이며 신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90년대 학번은 X세대다. 진지하기보다는 화려함을 추구했던 학번들이다. 이병헌과 김원준이 함께 광고했던 트윈엑스라는 로션을 쓰면서 문화대통령 서태지를 무기삼았던 사람들이란 말이다. 이 학번들에게 관심있던 것은 계급투쟁이나 독재타도보다 다이어트와 캘빈 클라인이었다.
선배가 얼마 있다가 장교로 군입대를 하는 바람에 이래저래 공사다망한 1학년은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상황을 꼽으라면 상대방이 내 호감을 몰라줄 때가 아닐까 싶다. 오히려 애인관계라면 둘 사이의 문제인지라 오해가 덜한데 선후배 관계에서 좋아하고 따르는 상대가 마음을 몰라주고 오해할 때는 정말 섭섭하다. 자신의 충성을 몰라주는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산초 판사의 심정이 그랬을까 싶다.
입학 때 잠깐 같이 다녔지만 대학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그 선배와의 관계는 마르크스에 유난히 거부감이 있던 X세대의 회피로 소원해졌다. 마음과 다르게 행동해버린 것이다. 졸업하고 한참만에 문득 만나보고 싶어 수소문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잊었던 마르크스는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위기나 공황이라는 말은 경제학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이론적이고 교육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다룬다. 마르크스가 이미 1848년에 혁명을 예감하고 1857년에도 경제학 책을 서둘러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바로 공황 때문이다. 그런데 2008년에 마르크스는 없었다. 국제 금융위기 때 이 위기를 미리 경고한 경제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다.
"유통은 직접적인 생산물 교환의 시간적, 공간적, 개인적 한계를 타파한다. 생산물 교환 내부에 존재하는 두 과정 사이의 직접적인 동일성을 판매와 구매라는 대립형태로 분열시키는 것이 유통이다. 이들 두 과정의 내적인 통일은 외적인 대립을 통해서 드러난다. 서로를 보완하면서 내적으로 의존해 있는 이들 두 과정의 외적인 대립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내적인 통일은 공황을 통해 폭력적인 형태로 관철된다. " - 자본 1권 p. 184
'자본론'의 시대적 배경인 1848년과 1857년과 마찬가지로 2008년에는 많은 고통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누군가가 금융위기를 설명해 주고 대안을 제시해 주길 바랬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경제학 교과서에는 공황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없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시작하는 경제학은 사람은 합리적인 개인을 상정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고 딱딱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책에는 사람이 있다. 이제껏 보아왔던 경제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부제가 '경제학 비판'인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그야말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경제학자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마르크스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자본제로 삼분하고 그 앞뒤에 원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를 두고 있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와 지리상 발견 종교개혁을 통해 사회가 격변하였다. 매뉴팩쳐운동을 통해 자본을 축척하는 자본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프랑스 대혁명 등을 통해 정치적 권리를 얻은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척을 거치면서 대자본가가 생겨나 산업사회로 변모한 것을 근대 자본주의로 본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가 되면서 사회적 모순 빈부격차 등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자본주의 모순의 극복을 위해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는 제도를 제안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을 통해 이미 신분제도가 사라졌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그러했다. 신분에서는 이미 자유로워졌는데 여전히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는 '의지'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당시 프랑스는 1830년 혁명 이후 비록 왕이 통치하긴 했으나 그것은 평민들과 타협에 의한 것이었고 신분제도는 거의 폐지된 상태였다. 따라서 1848년 혁명은 신분 제도를 문제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이 혁명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 수 없었고 공황으로 인해 그 일자리마저도 그게 줄었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먹고살겠다."는 '자신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선언한 마르크스의 책은 마치 프랑스 혁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혁명은 프랑스에서만 터진 것이 아니었다. 혁명은 불이 번지는 것처럼 비엔나, 프라하, 베를린, 밀라노 등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1848년을 아얘 '혁명의 해'라고 부른다.
전쟁과 혁명의 아수라장에서 경제는 엉망이 됐다. 날로 물가가 치솟아 민중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혁명 지도부 중 가장 과격파였던 로베스 피에르는 1793년 정권을 장악한 뒤 ‘최고가격제’를 실시해 일시적으로 물가안정을 이뤘다. 그러나 1년 동안 1만 명 이상을 ‘반혁명’ 혐의로 처형하는 등 지나친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2년 만에 실각한다. 최고가격제는 폐지되고 다시 물가는 뛰어올랐다.
바로 그 이듬해인 1796년 장발장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체포된다.
프랑스의 혼란은 1799년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 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비로소 일단락된다. 나폴레옹은 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국내 반혁명 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토지분배·법 제도 정비·초등교육 확립 등의 정책으로 사회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통령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1804년 스스로 황제에 즉위, 반혁명 위협이 사라졌는데도 외국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지속적 전쟁으로 사람들이 점점 나폴레옹에게 지쳐가던 무렵, 그는 워털루 전쟁에서 패해 1815년 완전히 몰락한다. 바로 이 해 장발장이 출소한다.
마르크스는 이로부터 3년 뒤인 1818년에 탄생한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에는 외국으로 망명했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돌아와 차례로 즉위한다.
오랜 전쟁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던 프랑스인들은 왕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처음에는 혁명세력의 눈치를 살피던 왕이 점차 언론자유를 탄압하고 선거권을 축소하는 등 과거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1830년 7월 다시 한 번 혁명을 일으켜 새 왕을 추대한다.
이 혁명을 ‘7월 혁명’이라 부른다. 이 때 왕위에 오른 이가 ‘루이 필리프’이다. ‘레미제라블’은 이 시대를 무대로 본격 펼쳐진다.
장발장은 앞서 1820년대 프랑스 북부 소도시 몽레이유에서 새로운 구슬 공정을 개발, 기업가로 거듭나며 크게 성공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다른 프랑스 지역보다 산업화가 먼저 진행된 곳이었다. 공장을 소유한 부르주아들은 산업화로 인한 성장에 힘입어 예전의 귀족과 같은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다.
도시 인구는 갑자기 늘어났지만 주택, 수도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불량한 위생으로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발생했고, 이 때마다 슬럼가에 사는 빈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1831년 콜레라 대유행이 단적인 사례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물가도 함께 오르는데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빈민가의 남성들은 시름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성들은 살기 위해 매음굴로 흘러들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려져 부랑아가 됐다.
부르주아의 시대이자, 거지와 부랑아와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매춘의 시대였다. 팡틴과 가브로슈, 테나르디에 일당은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장발장’과 같은 선량한 자선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선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는 ‘산업 자유에 관한 원칙’에 따라 부르주아들을 전혀 규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은 ‘바리케이드의 시대’를 열었다.
1830년 프랑스 리옹에서 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들은 억압당한 '자신들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압축해서 외쳤다.
"일하면서 살거나 싸우다가 죽겠다."
리옹 사건을 계기로 빈민과 노동자들, 공화주의 성향의 학생들은 7월 왕정에 등을 돌렸다. 걸핏하면 폭동이 일어났다.
1832년 6월 5일, 나폴레옹의 부관 출신 국회의원으로 ‘민중의 편’에 섰다고 평가받는 라마르크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폭동도 그중의 하나였다. 마리우스는 왕정을 뒤엎기 위해,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이 폭동에 참여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다소 규모가 작은 폭동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바리케이드가 십 수개 이상 세워지고 약 800명이 사망한 대규모 폭동이었다. 하지만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1835년부터는 폭동도 잦아들었다. 이후 프랑스는 부르주아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한다.
1835년부터 안정을 유지했던 루이 필리프 왕정은 1846년 대흉작으로 또다시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마침내 1848년 2월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돼, 루이 필리프 왕정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민주공화정이 정착하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더 겪었다. 2월 혁명 이후 선포된 새로운 공화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통령으로 당선됐다. 그 역시 스스로 황제(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군주정은 왕에 의해 다스리는 제도이고 공화정은 다수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가 다스리는 제도이다. 공화정은 다음과 같이 여러 형태로 분류된다. 과두정은 왕이 없이 다수의 대표자가 다스리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민주정은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이 다스리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공화정은 군주정에 반대이고, 민주정은 과두정의 반대인 셈이다. 여기서 프랑스가 채택한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공화정인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권위주의적이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개혁안을 마련하는 한편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외국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해 물러난다.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난 이후 프랑스 급진 좌파 세력이 봉기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자치정부 ‘파리 코뮌’을 결성한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정부에 진압돼 약 3만 명이 처형당하는 처참한 결과로 끝났다.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출범한 ‘제3공화정’에 가서야 프랑스는 극좌와 극우 사이를 오가지 않고 민주공화정으로 정착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거의 100년이 걸렸다.
마르크스는 단순한 의지의 관철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에야 할 점이 있다. 헬렌 노르베지 호지의 '오래된 미래'에 보면 자본주의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긴 하지만 그 대신 사람들 사이의 경생과 갈등을 만들어 내고 인간의 의지를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자본주의 이전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마르크스는 자연법칙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노인이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전인 1960년대에는 이웃과의 따뜻한 온정이 살아있었고 사람들 사이의 각박한 경쟁은 별로 없었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사는 사람끼리 서로 인사도 안 하는 것은 물론 돈 때문에 재벌가의 가족이 서로 다투고 소송까지 한다. 모두 자본주의가 빚어낸 경쟁에 사로잡혀 서로가 상대방의 의지를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1960년대로 돌아가자고 하면 받아들여질까? 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본주의는 원래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에 등장했고 그것 때문에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제안한 것은 경쟁과 차별 대신 연대와 협력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남보다 '더' 부자가 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부자가 되는 것, 즉 부를 타인에 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것을 타인의 것과 합쳐 더욱 늘어난 부를 타인과 함께 갖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화 사회에서는 타인의 의지를 억압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타인의 의지를 존중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는 무덤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정당은 새누리당과 민주당만 있고, 헨드폰은 아이폰과 갤럭시만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그 이상의 시각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작이 꼬이면 끝도 꼬이게 마련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와 소련이 감행한 공산주의는 자본가를 무너뜨리는 자목표는 동일했을지언정 환경은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성숙해야 공산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17년 당시 혁명을 했던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못했던 봉건제 국가였다.
소련이 붕괴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 이런 이야기 조차 식상하다고 생각하실 분들 많이 있으실 게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시야를 휘바~휘바~로 유명한 자일리톨의 나라 핀란드로 돌려보자. 알려진 바와 같이 핀란드는 복지도 좋고 교육 선진국으로 학부모들에게는 최고의 부러움 대상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과거 핀란드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경쟁이 심하고 사교육도 많았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건전한 사회로 거듭난 것이다. 사회민주당? 이름이 생소하다. 중도 보수를 표방하는 우리나라의 민주당과는 차원부터 다르다는 말씀. 마르크스 사후에 독일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강력한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세워졌다. 이 사회민주당이 유럽 전역에 퍼져 마르크스의 이념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날 북유럽을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든 원동력이다.
정리해보면 소련은 사회주의를 잘못 받아들여서 러시아로 되돌아간 것이고 북유럽은 올바로 받아들인 덕분에 빅유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공교육에서는 진로교육이 한창이다. 어린 학생들의 경우에는 역사 위인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아이들의 책장을 들쳐보다 보면 이순신장군이나 김구, 슈바이처 등등... 우리가 어릴때 알고있는 사람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종종 안타까울 때가 있다. 오해받았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시각이 생각보다 현실의 교육현장에 잘 반영되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영화 '암살'이후에 '약산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듯이,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마르크스야 말로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