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한민국에서 민중의 힘을 악용하는 충격적인 사례가 적발됐다.
혁명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가?
왜 가치 체계는 바뀌는가?
여론은 어떻게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가?
역사의 거창한 질문은 종종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18세기 프랑스인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기로 하자.
- '책과 혁명'
지난 1년간의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았다.
전년도에 멘토서적이 대거 휩쓸고 지나갔다면 최근 목록을 보면 전반적으로 문학작품이 강세다. 이병률이라는 여행작가 이후 몇년째 여행관련 책은 꾸준히 10위권 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역시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이라는 여행책이 들어있다. 현대인의 관심사에 여행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을 반증한다. 인문학 열풍인 대한민국에 철학서도 빠질 수 없다. 다만 철학자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고전소설에 인문학을 접목한 책이라고 보면 시민들의 삶이 팍팍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
이처럼 베스트 셀러는 그 시대 국민의 문화 트랜드를 알려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OECD국가중에 최하위를 달릴 정도로 책을 안본다는 우리나라 사람이라지만, 이 목록중에 제목 정도는 들어본 책이 제법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떠네 강신주가 어떠네 하는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술자리에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읽고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는 책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 자료는 1769년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의 불법 판매서점의 베스트셀러 판매현황이다.
TV도 없고, 영화도 없고 만화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이런 불법 서점에서 욕구를 해소했다. 로버트 단턴은 이 금서목록에서 프랑스대혁명(1789)이 탄생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작가가 단서를 단 바와 같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민중들에 대한 간접적인 의식화 교육의 역할을 하는 데에 이 금서들의 목록이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것이다.
목록을 보면 왕의 사생활을 직접 모사하는 서적들이 제법 보인다. 우리로 말하면 '의자왕와 3천 궁녀의 밤 이야기'쯤되는 내용들을 책으로 만들어서 봤다는 것이다. 물론 불법이라고 해서 오로지 빨간 책만 취급하진 않는다. 볼테르나 장자크 루소 등 유명 철학가 책들도 상당수 보인다.
'책과 혁명'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주목한 것인 이 어중간한 조합의 사이 어디쯤, 민중의 지성이 싹튼 지점이다. 과연 책이 프랑스 대혁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책과 혁명'을 살펴보면 책이 시민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미국 뉴욕 출신의 1939년생인 로버트 단턴은 출간되던 해 『LA타임스』 역사학 부문 최우수 도서로 선정된 『고양이 대학살』(1984)과 미국비평가협회상을 받은 『책과 혁명: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1996) 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책의 역사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도 『책의 미래』(2009), 『성수 속의 악마, 혹은 루이 14세부터 나폴레옹까지 중상비방문의 기술』(2009) 등의 책을 꾸준히 펴내면서 구어의 세계는 물론이고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제1부 '금지된 문학과 문학시장'에서는 프랑스 외곽에 위치하여 당국의 눈을 피하기가 용이했던 뇌샤텔이라는 출판사의 문서를 통해 불법 서적시장을 분석한다. 당국에 의해서는 '나쁜 책'으로 불린 금서는 불법 서적업자들 사이에서는 '철학서적'으로 통했다. 당시의 장부를 꼼꼼히 조사한 저자는 다음과 같은 판매고까지 찾아서 소개한다.
위에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생소한 작품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14위 '창녀'와 15위 '계몽사상가 테레즈', 16위 '희극과 음란한 노래... 모음집', 21위 '방황하는 창녀'는 소위 말해서 빨간 책이다. 감히 여기서는 삽화를 소개하기도 민망한 춘화가 가득한 야한 책이다.
세법에서 과세품과 면세품을 구분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바로 국민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건 과세요, 싫어하는 건 면세다. 여기 이 목록을 보면 책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대다수가 쉬운 책은 좋아하고 어려운 책은 싫어하는 것이다. 1770년의 프랑스를 저자는 당시 베스트셀러 목록을 이렇게 정리한다. "18세기 프랑스 문학시장에는 오늘날 거의 완전히 잊혀진 베스트셀러가 넘쳐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2부 '주요 작품'에서 저자는 당시의 베스트 셀러 원문들 그대로 소개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마존 52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1770년 당시 장기 베스트셀러 1위에 빛나는 '2440년, 한번쯤 꾸어봄직한 꿈'은 물론이고,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보여주는 '계몽사상가 테레즈'와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를 직접 읽어볼 수 있다.
베스트 셀러인 '2440년, 한번쯤은 꿔볼만한 꿈'은 700년 후에 깨어나는 어떤 귀족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물이다. 2015년인 지금에 바라봐도 막연한 미래 2440년의 프랑스를 1770년의 파리지앵은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강대국의 흥망에서 폴 캐네디는 국가의 흥망성쇠의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로 경제력을 강조한 바 있다. 저자 역시 국민 대다수가 좋아하는 이른바 돈벌이가 되는 책이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퇴폐적인 국왕을 우회적으로 조롱하고 무능한 정권을 비판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한발 더 나가서 카페가 일찌기 발달했던 파리의 문화와도 연결을 시킨다. 이런 특수성 덕분에 대중들은 프랑스에서는 일찌기 국왕의 인간적인 면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제3부 '책이 혁명을 일으키는가?'에서 저자는 생각의 전파를 고찰하면서 책에 주목한다. 전파되는 것은 담론이나 여론이 아니라 책이라는 점이다. 만약 '계몽주의는 얼마나 널리 전파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면 먼저 18세기에는 어떤 책이 실제로 가장 널리 유통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저자는 18세기의 다양한 자료를 분석하여 독자들이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관념들을 제멋대로 책에 투영하면서 생각을 전파한다고 주장한다. 아래 의사소통의 그물을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학은 저자와 독자, 또는 독자와 텍스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의사소통 체계를 통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체계는 모든 지점에서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금서에 관한 연구의 경우 질적 증거가 양적 증거를 보완하기 때문에 분석에 매우 유용하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저자는 지배층이 시민을 깨우쳤다는 계몽주의 사상과, 정치적인 견해를 주도하는 여론의 역할에 의문을 던진다. 베스트 셀러의 목록에서 보았듯이 시민들의 정신을 깨우친것은 사상가들의 계몽적이고 철학적인 책이 아니라 불법서적들이다.
실제로 '계몽사상가 테레즈'를 보면 일관성 있는 체계의 혁명적 사상을 선정성으로 포장하여 교묘하게 민중을 자극하고 있다. 주인공 테레즈는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기술적인 어려움이나 논리적인 결함에 구애받지 않는다. 대신 자기 논지를 고착시키기 위해 인생과 경험으로 보여줄 뿐이다.
자와 할랄 네루는 자유·평등·박애를 내걸고 부르봉 왕조를 타도한 프랑스대혁명의 사상적 근거를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찾은 바 있다. 루소는 이 책에서 평등한 개인 간의 계약으로 국가가 형성된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큰 영향을 준 책은 바로 혁명 전에 유행했던 연애소설들이다.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철학적 저술과 함께 야한 소설을 썼다.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만 발표한 게 아니라 '신 엘로이즈'라는 연애소설을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시민의 봉건제 폐지 결정은 갑작스러운 지배층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결과였다.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카오를 꼽을 것이다. 이런 최첨단의 SNS시대에 로버트 단턴은 왜 자료도 태부족한 책에 집중한 것일까? 그것도 1770년대의 옛날 서점자료까지 뒤지면서 말이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해보건데 아마도 이런 사실을 검증해보고 싶은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구는 달라졌으나 사람들의 행동패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로버트 단턴은 '책과 혁명'의 서문에서 다음 네가지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1. 몇작품을 골라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내용 분석이 어떻게 학문의 한 분야로서 서적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지 보여주고 싶다.
2. 서적의 역사가 어떻게 의사소통의 역사라는 좀더 넓은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지 보여주고 싶다.
3. 이념의 표현과 여론이 형성을 조사하고 싶다.
4. 프랑스혁명의 기원에 대한 정치사 영역을 논증하고 싶다.
1787년 독서 대중은 모든 종류의 불법 서적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서적은 '앙시앵 레짐(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체)'의 정통 가치를 모든 방면에서 공격했다.
"루이 15세의 치세 마지막 폭풍우가 몰아치던 시절, 원고 형태로 나돌던 중상비방문은 이제 인쇄물로 나타났다. 그것은 군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상비방문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눈길을 돌려, 루이 16세를 고자로 추정하면서 놀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성적으로 질탕한 판을 벌리고 논다고 한탄했다."
신문도 잡지도 없었던 시절, 작은 소책자 형태의 중상비방문이 혁명의 사상을 지배하고 전파했다는 것은 재밌는 부분이다. 소책자를 통한 사상의 전파는 그후 계속적으로 이어졌으며, 50년 후에 세계 역사를 바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바로 단턴이 말한 이 소책자였다. 민중의 힘이 책으로 구체화된 셈이다. 요즘은 페이스북과 트윗, 블로그 등을 통해서 민심을 읽을 수 있지만 맥락과 흐름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책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몇년 전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가 국정원 댓글사건에 대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내용을 잠시만 들여다보자.
"박근혜 대통령이 그래요. 내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나요?
뭐 그래서, 그건 모르죠, 계량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러나 지금 와서 우리가 대통령선거 다시 하자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국정원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말,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왜 이 사안을 매듭짓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고 하십니까. 정말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겁니다. 내가 진짜 답답해서 그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이거 어제 의총장에서도 안 한 말인데 이제 생각이 나네. 후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7649)
대선 이후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댓글을 조작하고 여론몰이 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선거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만 다를 뿐이다.
국정원 직원이 타임머신을 타고 1770년 프랑스로 간다면 아마 루이 16세에게 이렇게 조언할게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대 최고의 문필가에게 왕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쓰게 하십시오. 야하고 자극적이면서도 재밌게 말이죠. 하지만 왕은 절대무적이며 정의롭고 금욕주의자로 묘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반값에 서점에 풀어버리십시오. 아마 왕의 인기도가 급상승 할겁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역사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김 전 대표는 21세기 첨단시대의 컴퓨터가 만든 데이터도 계량화하지 못한다고 꼬리를 내렸지만 로버트 단턴은 240년전의 자료도 계량화하는데 성공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이래 줄곧 인간세상은 '왕'이 지배했다. 왕도 시민도 모두 인간이라는 평등사상을 처음 실행에 옮긴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였다. 임기동안만 국민을 대표하는 인간중심의 정치체제인 공화정을 최초로 꿈꾸고 설계한 '로베스피에르'. 그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던 천재 '마르크스'도 탄생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는 후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안타깝게도 후퇴하는 국가가 더러 있다. 수백년째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도 부지기수다.
이유가 뭘까?
전진하려면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요즘 언론에는 망나니같은 정치인들이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이토록 난립하는 것이 어찌 정치인들만의 잘못이랴. 국민이 깨어있어야 정치인들도 정신차릴 것이다.
로버트 단턴이 찾아낸 책과 혁명의 상관관계. 이것이 지금 우리 국민이 독서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