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운전사의 감미로운'모란동백'을 들으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조영남 '모란동백'
작년 이맘때쯤 대구에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바쁜 마음에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어떤 엄마의 훈훈한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수능을 마친 딸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모녀가 함께 동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다.
한참 사연을 듣던 택시 운전사 아저씨께서 대뜸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기사님이셨다.
- 아 거참 촌스럽게 동해가 뭐여. 딸래미가 시험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유럽여행정도는 가줘야지
뭔가 응대를 해줘야 할거 같은 분위기에 나도 몰래 되물었다.
- 어르신은 여행을 좋아하시는가봅니다.
질문을 잘한건지 잘못한건지 택시 운전사께서 말을 받기에 앞서 운전석 옆에서 뭔가를 꺼내신다.
- 이게 내가 작년에 독일가서 찍은 사진이요. 이건 베를린의 브란덴브루크 문이예요. 이건 페르가몬 박물관이고...
뭔가하고 봤더니 앨범이었다. 사진을 보니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긴장되고 흐믓한 표정이었지만 혼자여서 조금은 쓸쓸한 일흔이 넘은 택시 아저씨의 여행사진. 가이드가 찍어줬다고 했다.
- 내 비록 별거 아닌 택시운전을 해도 이렇게 가끔 충전하면서 사는게 인생 아니겠소? 일하다 목돈 생기면 여행다니는 그맛에 산다우...
조금씩 호기심이 생긴 나는 택시 운전하시는 분 치고는 제법 즐기실줄 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정도면 몇달은 벌어야 했을텐데... 하는 생각에 질문을 했다.
- 꽤나 여러 곳에 다니신 모양이네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 노래자랑에 나가서 상을 탓지요. 상금 500만원을 받아가 유럽여행다녀온거 아이겠습니까. 전국에 노래 대회가 몇개 있는데 그간 소소하게 작은 상은 탔지만 작년에 아주 큰 대회에 가서 1등을 했습니다. 어때예 내 노래 한번 들어보실랍니까?
- 네? 아 네....
나는 깜짝놀라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을 하고 말았다. 말이 떨어지자 말자, 씨디 한장을 꺼내서 플레이어에 끼우셨다.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서 어르신은 그 위에 노래를 덧 입혀 불렀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줘요
이게 무슨 노래냐고 묻는 내게 택시 아저씨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 조영남의 모란동백 아닙니까
화개장터만 알고 있었는데, '자니 윤 쇼'의 조영남이 이런 멋진 노래도 불렀었구나. 참 좋았다. 놀라운건 조영남의 노랫가락보다 택시 아저씨의 목소리가 훨씬 좋았다는 것. 이렇게 택시 안에서 나는 몇 곡의 노래를 더 들었다. 조영남을 좋아하시는지 전부 조영남의 노래였는데 역시나 처음 듣는 곡이었다.
몇 십분동안 택시 안은 노래방이 되었다. 아니 콘서트장이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출장지의 각박함을 잊고 눈을 감은 채 감미로운 운전사 아저씨의 선율에 폭 잠길 수 있었다. 감은 눈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운전사 아저씨의 나이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우리 아버지도 노래를 참 잘 하셨었는데...
당황스러웠지만 워낙에 노래를 잘하셔서 듣기 나쁘지는 않았다. 인물도 좋고 키도 훤칠하신 걸로 봐서 젊었을때 한가닥 하셨을 것 같은 어르신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노래를 마치신 기사분께 언젠가 생각날지 모르니 선생님 사진 좀 찍어둘께요하며 한장 찍었다.
반가운 손님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게 마련이다.
몇일 전 회사 근처 자주가는 호프집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을때가 그랬다. 처음 듣는다는 동료들에게 이 노래를 부른 이가 조영남이라며 설명해주니 제법 호응이 좋았다. 마침 취기도 있고 해서 그때 그 기사 아저씨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러 웃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 내 비록 별거 아닌 택시운전을 해도 이렇게 가끔 충전하면서 사는게 인생 아니겠소? 일하다 목돈 생기면 여행다니는 그맛에 산다우...
그렇게 스스로는 낮추면서 말씀하셨던 그 택시운전사의 절반만큼이라도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있는가...
문득 정호승의 '고래를 위하여'라는 시가 떠올랐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비록 청년은 아니지만 힘든 와중에도 가슴속에 고래 한마리 키우시던 택시 아저씨. 그 분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태해진 마음을 추스려본다.
그리고...
맨날 아이들만 세워놓고 노래 시켰었는데, 이번 연말에는 부모님께 노래 한번 청해서 들봐야겠다. 아이들이 얼마나 즐거워할까~
조영남의 모란동백 노래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