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의 첫 유럽여행기> 1편
누구도 자신이 진성 집순이인지 알지 못한다. 장기 여행을 떠나기 전까진..
2019년 1월, 28살에 난생처음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몇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진성 집순이로서 유럽여행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일탈이었다. 이제는 전생 같아진 그때를 보고 있노라면 낯선 이국 땅에 스스로 발 디뎠다는 것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물론 유학생인 친구가 함께였기에 훨씬 부담이 덜했지만, 낯선 환경에서 극도로 긴장하는 쫄보력과 내 침대 아니면 잠도 잘 못 자는 예민함 탓에 분명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약간 김 빠지는 얘기를 하자면, 나는 유럽여행을 다녀온 뒤 더욱더 집을 사랑하게 되었다. 진짜 집순이는 유럽여행을 다녀옴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 집의 소중함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여행을 좋아하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여행 사진을 들춰보며 그때를 그리워한다. 눈물이 찔끔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풍경도, 미친듯이 집이 그리워졌던 순간도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여행기를 사진과 일기장을 더듬으며 다시 써보려 한다. 왜냐면 최소 2030년까지는 이런 장기 여행을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 글을 시작하는 때에 할 말은 아니지만(?) 굳이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니 이 귀한 기억을 최대한 붙잡아둘 수밖에.
아무쪼록 집순이&집돌이도 밖순이&밖돌이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나는 여행에 안 맞는 성격이다
집순이도 여행을 간다. 20대 초반에는 부산도 두세 번 다녀왔고, 전주 한옥마을과 보성 녹차밭도 구경했다. 짧은 해외여행으로 홍콩과 푸켓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녀오고 나서 짐을 풀 때면 ‘나는 여행에 안 맞는 성격이다.’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잠자리였다. 여행지에서 잠을 잘 때면 숙소의 방음 상태와 별개로 깊이 잠들기 어려웠고, 분명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공원 벤치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또 빡빡한 일정에 쫓기듯 다닐 체력이 안 되니 남들 가는 곳을 못 간 채 돌아올 때가 많았고, 그러면 왠지 본전을 못 뽑고 오는 것 같아 찜찜했다.
예를 들어, 홍콩 여행을 다녀왔지만 디즈니랜드도 안 가고 마카오도 안 다녀왔다고 말하면, 홍콩에 다녀온 사람들은 ‘아니, 그럼 대체 홍콩 가서 뭐 했어?’ 놀라며 되묻는다. 그럼 나는 ‘그러게요.’ 하며 멋쩍게 웃고 마는 것이다. 여행을 갈 줄도 몰랐고 어찌어찌 다녀와도 뭐가 좋은지 몰랐다. 해외에 머무는 며칠을 위해 100만 원 단위의 돈을 쓰는 것이 값비싼 일회용품을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들 왜 그렇게 여행을 떠나는 걸까?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늘 궁금했다.
하지만 SNS를 보고 있으면 정말 나만 안 간다는 말이 딱 맞았다. 너도나도 기회만 되면 해외여행을 떠났고, 특히 대학생 땐 유럽여행을 가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때론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흠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괜히 위축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유럽 한번 가볼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막상 누군가 유럽여행을 준비하는 걸 지켜보면 '어떻게 저렇게 다 준비해서 그 긴 시간을 돌아다니다 오는 걸까?' 하는 생각뿐이었고, 여행은 일상에 밀려 쉽게 잊혔다.
작년보다 나은 내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
27살 12월, 나는 인턴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었다. 20살에 생각했던 내 27살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 밥벌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까지 취업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멘탈이 바스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취업을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일모레면 28살이 되는데 도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취준에 성공해서 원하던 회사에 입사하고 회사를 위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행복하다가도, 이대로 어영부영 나이를 먹고 35살 쯤이 된 나를 상상하면 모든게 갑갑했다.
남들과 비교하기에는 이미 한참 느리게 성장 중인 내 인생을 감안하더라도, '작년의 나'보다는 발전된 삶을 살자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키지 못한 채 도태되고 있다는 부정적 생각만 늘어가고 도무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불안한 2018년 겨울이었다. 그때 27살보다 약간 더 나은 28살을 만들 아주 간단한 방법이 떠올랐고, 그게 바로 유럽여행이었다.
'아이고 그냥 남들 다 가듯이 놀러 가는 건데 그게 뭐? 의미부여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그냥 놀고 싶은 거지? 자소서 쓰기 싫지?' 이런 비뚤어진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집에 있는 게 마냥 좋고 낯가림 심한 내향형 인간을 유럽에 던져 놓고, 초긴장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앞날이 조금 걱정됐지만 ‘어차피 가도 백수고, 안 가도 백수다.’ 그런 마음으로 유럽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도 안 가는 1월 비수기 유럽여행. 막상 떠나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혼자 떠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는데, 다행히 중학교 친구가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영국에 놀러 오라는 말을 대학시절 내내 했는데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친구는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고,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 함께 여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여행 기간은 오로지 나의 현금 보유 상황에 따라 결정했다. '욜로하다 골로 간다.'는 말에 깊이 동감하는바, 유럽을 다녀온 뒤 부모님께 생활비를 타 쓸 수는 없었다. 백수 기간이 장기화될 것을 대비해 어느 정도 총알을 남겨 놓겠다고 생각하니, 여행은 20일 정도 다녀올 수 있겠다 싶었다.
일단 친구가 살고 있는 런던을 마지막 여행지로 정했다. 그리고 런던에 가기 전에 갈 나라 두 곳을 정해야 했다. 하지만 서울처럼 영하 10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외에,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각기 다른 감상을 전했다. 누구는 프랑스 파리가 최악이었다고 말하고 누구는 에펠탑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를 평생 못 잊을 것 같다고 했다. 퇴사할 때 즈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의 상태가 되었고, 별 감흥 없이 여행 글을 뒤적거렸던 것 같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정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여행
유럽 여행기 수십 개를 읽어본 뒤 생각한 것은,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런던의 관광지 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해리포터 스튜디오'였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당시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책이 나오면 곧바로 사서 읽은 뒤 다음 시리즈가 나올 때까지 읽고 또 읽어서 한 권당 20번은 읽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매일 아침 등굣길에 우체통을 확인하며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를 기다렸고, 결국 6학년이 되고 나서야 '한국인이라고 입학 안 시켜주는 거냐?'며 씩씩거렸다. 그러니 런던에서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꼭 가야겠다 생각했고, 조앤 k 롤링이 글을 쓰곤 했다는 에든버러의 엘리펀트 하우스도 가보고 싶었다.
또, 나는 딱히 책을 읽지 않더라도 광화문 교보문고나 종로 영풍문고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서점에 있는 것 자체가 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럽에도 많은 서점이 있으니 서점 투어를 해보고 싶었다. 특히 포르투갈에 위치한 조앤.k.롤링이 영감을 얻었다는 렐루 서점을 두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어렵게 생각했던 여행 일정도 생각보다 술술 풀렸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유명지를 가더라도, 남들이 가니까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 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면, 여행지에 가서 볼 것들에 대한 정답도 쉽게 나왔다.
특별할 것 없는 여행
이외에도 필기구나 노트를 되도록 많이 사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소하게는 각 도시의 스타벅스에 가보고 싶었다. 어디서 무얼 하든 '남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것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는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야 남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여행이,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다.
'그래도 수백만 원을 써서 다녀오는데, 그동안 몰랐던 자아를 발견한다거나 갑자기 머리에 돌을 맞은 것처럼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여행을 터닝포인트 삼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여행 전날까지도 나는 현실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여행에 대한 확신이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므로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내 인생은 똑같이 굴러갈 것이 뻔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여행의 의미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평생 침대 밖을 벗어날 줄 몰랐던 집순이가 유럽을 제 발로 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여권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