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의 첫 유럽여행기> 3편
겨울낮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온도를 좋아한다.
여름밤, 가을아침, 겨울낮.
여름밤과 가을아침은 고유명사처럼 익숙한데 왜 '겨울낮'은 익숙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서울의 겨울은 낮이든 밤이든 칼바람이 불기는 매한가지라서 그런 것 같다.
바르셀로나를 첫 여행지로 정한 것은 한국보다 꽤 따뜻하다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코트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도시가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새까만 롱패딩을 제2의 피부처럼 입고 다녀야 하는 서울의 겨울과는 다른, 영상 14도의 겨울이 그곳에 있었다. 만약 바르셀로나에 살게 된다면 나는 여름밤만큼이나 '겨울낮'이라는 단어를 애정하게 될 것 같다.
바르셀로나의 8할은 가우디
따뜻한 날씨만 보고 덜컥 바르셀로나에 온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많은 도시 중 바르셀로나를 선택한 것은 누구나의 이유처럼, 가우디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가우디 전시회를 갔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의 얄팍한 식견으로도 단번에 이 사람은 그냥 천재구나 싶었고, 이후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은 살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옷이든 소품이든 단순하고 정갈한 민무늬를 좋아하는데, 선호도 측면에선 분명 그의 건축은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을 직접 두 눈에 담고 나니 취향의 호불호를 뛰어넘는 변태적인(?) 디테일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행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물론 언젠가 완공이 되는 날 꼭 다시 와보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만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투어는 필수
가우디 건축물은 바르셀로나 곳곳에 퍼져있다. 따라서 유럽여행 초심자라면 어떤 형태로든 가우디 투어에 동참하는 것이 낫다. 관광버스나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투어 상품도 있지만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투어를 선택했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다니는 수고로움 없이 바르셀로나의 길거리를 맘껏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퇴사한 지 2주 만에 심신이 매우 지친 상태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고, 졸업시험을 치른 친구 또한 지쳐있기로는 나 못지않았다. 우리는 여행 내내 거의 노부부처럼 다녔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우디 투어를 하는 날만큼은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부지런함이 필요했다. Fontana역에 8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했고 우리는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났지만 결국 택시를 탔다.
역 앞에 모여 가이드분을 만나고 가장 먼저 교통카드를 구입했다. T-10은 10번을 탈 수 있다는 뜻인데, 가우디 투어를 하는 동안 8번 정도 사용했다. 그리고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는 빵과 우유를 사고 투어를 함께할 일행들을 기다렸다. 이때도 크로와상을 먹었지만 전날 먹었던 호프만 베이커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주 평범한 크로와상이었다.
가우디와의 첫 만남, 까사비센스
가장 먼저 보았던 곳은 까사비센스다. 까사비센스를 번역하자면 비센스씨의 집이다. 비센스씨는 타일 공장 사장이었다고 하는데, 동네에 처음 온 사람이 '타일공장 사장댁이 어디요?' 하고 굳이 묻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챌 만큼 타일이 다양하게 붙어있다. 가우디의 초창기 작품이기도 하고, 이후에 본 건축물이 더 인상적이라 사실 까사비센스에 대해서는 크게 기억나는 게 없다. 그냥 목욕탕 타일을 보는 느낌이었다.
비수기 유럽여행의 단점은 바로 이런 것
까사비센스를 보고 이동한 곳은 구엘공원이었다. 가우디의 친구이자 후원자면서 엄청난 부자였던 구엘은 집뿐만 아니라 아예 전원 도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집을 여러 채 짓고 부유층에게 분양을 할 계획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구엘공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구엘씨는 아쉬워했겠지만 그 덕분에 우린 지금처럼 아름다운 구엘공원을 거닐 수 있게 되었다.
구엘공원의 곳곳을 살펴보기도 전에 1월 비수기 여행의 단점을 알게 되었는데, 많은 관광지가 비수기에 보수공사를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곳이 공사중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한쪽에 잔뜩 포대자루가 쌓여있는 풍경을 마주해야 했다. 사람에 따라 거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수기인 덕분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이기도 했으므로 모든 것이 일장일단이라 생각했다.
구엘공원에는 구엘의 집을 포함해 여러 집이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쪽은 자연물이었다. 특히 구엘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러 형태의 돌기둥이 인상적이었고, 가장 많은 사진을 남겼다. 친구와 나는 '아니 이걸 이렇게까지 깎아놓는다고..?' 하는 의문과 함께 '가우디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 힘들었겠다' 하는 철저히 직장인 시선의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앞서 까사비센스의 타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면, 구엘공원의 타일은 시간이 흘러 때가 타고 색이 바랬음에도 여전히 예뻤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색감이 촌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만 작은 조각의 모자이크를 보고 있자니 외할머니 집에서 자개장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이었다. 촌스럽지만 왠지 멋져. 짜릿해.
자연에서 모든 영감을 얻었다는 가우디. 그가 생각하는 건물은 자연에 어우러지는 모습이었고, 그 다짐대로 모든 건물이 구엘공원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구엘씨의 바람대로 수십 명이 이곳에 입주해 더 많은 건물이 지어졌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구엘공원에서 본 건물 중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이 두 곳인데, 오른쪽 건물은 놀랍게도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이다. 경비실을 이렇게 예쁘게 짓다니. 마치 동화 속 과자집 같은 모습이었다. 현재는 기념품을 파는 곳으로 이용 중이다.
기념품을 사기 위해 장난감 집으로 들어갔다. 엽서만 살까 하다가 뜬금없이 이 도마뱀 인형에 꽂혔는데, 첫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지르기에는 손이 떨렸기 때문에 끼워만 보고 내려놓았다. 결국 대리만족으로 1유로짜리 엽서만 잔뜩 사서 나왔는데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산 엽서가 여행 내내 산 것들 중에 가장 못생겼다.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예쁜 엽서들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구엘공원에서 산 엽서는 대부분 내 방 서랍에 남아있다. 옆에서 친구가 말릴 때 그만 샀어야 했다.
밀도 낮은 관광지의 맛
구엘공원의 마지막 코스는 바로 도마뱀과 사진을 찍는 것이다. 비수기의 큰 장점은 내가 원하는 만큼 여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구엘공원에 있는 동안 만난 사람들은 사진 속 사람들이 전부다. 그러니 도마뱀과 사진을 찍을 때도 그저 몇 명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잠시 기다리면 된다. 물론 두꺼운 옷을 입고 있으니 멋은 조금 덜 나지만, 이곳에서 밀도 낮은 관광지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종종 겨울 유럽여행을 갈 것 같다.
겨울에 만난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야자수는 날카롭다. 하지만 햇살만큼은 겨울의 온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겨울낮의 구엘공원은 충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