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강릉에서
여행을 하고 나면 항상 하는 일이 있다.
여행의 순간에서 느낀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일이다. 인생에서 어느 순간은 시간이 지나면 왜곡되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이건 나름대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글로서 붙잡아 두는 방법이다. 이번 강릉 여행은 순간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힘들어 질 때면 항상 바다를 찾고는 했다. 강릉에 도착해서 밤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나는 왜 바다를 좋아할까.
나는 여수라는 바다가 앞에 있는 곳에서 태어나 14년을 함께 자랐다. 그렇기에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바다가 앞에 자리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누비고 다니던 동네 앞에도 바다가 있었고, 학교 비상계단에 앉아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간식을 먹을 때에도 바다가 보였다. 학원을 가는 길목의 언덕에서도 바다가 보였고,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할 때에도 노을이 지는 바다를 옆에 두고 천천히 걸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에는 바다가 존재했다. 내 어린 시절 모든 순간에는 바다가 있었지만, 지금은 어른이 되어 바다와 멀어졌다.
푸른 바다 대신, 회색의 빌딩의 파도에 휩쓸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원래 가끔 보면 더 애틋해 진다고 했던가. 이제는 나에게 바다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그리울 수밖에.
어른이 되면 책임질 것들이 많아지고,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피로해지는 때가 문득 오게 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그 때 그 시절의 바다 앞에서 지냈던 기억이 나를 바다로 이끌어 내는 모양이다. 힘든 일이 많았던 요즘에 무작정 떠난 이번 여행에서는 바다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도착해서 느낀 것. 역시 바다를 보면 확실히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렇게 바다 앞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세상에는 참 재밌는 것들도 많고, 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해볼 것도 많고, 해야만 하는 일도 많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의 모든 시간에서 모든 일은 과부화가 걸린 상태였다. 항상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한정적인 시간을 좀 더 쪼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투두 리스트에는 오늘 안에 해치우지 못할 많은 리스트들이 존재했으며, 나는 남은 할 일 목록들에 잠겨 오늘을 부족하게 살았다고 매번 아쉬워했다. 그렇게 반복한지 어언 몇 년 즈음 지났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을까. 제대로 즐기고 있을까, 나는 꼭 이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걸까.
시간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간은 무한정이었으면 좋겠다는 모순 속에서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내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라는 그 말 한 마디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우선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가슴속으로는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게다가 해야 할 일을 못 해내면 어떨까. 당장 내 앞에 바다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모든 것을 쥐려고 아등바등 대는 사람보다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멋있는 것이라고. 삶을 상담해 주는 선생님께 들었다.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인 모양이었다. 이런 고민들도 결국 웅장한 자연 앞에 서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결국 이런 고민을 하는 나조차도 저 물과 흙에서 시작한 존재였을 테니까.
내 어릴 적의 꿈은 화가였다. 어릴 적에는 다들 한 번 진부한 꿈을 꿔 본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보통의 꿈을 베껴온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12시간을 밥만 먹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저 재밌어서 집중했을 뿐이었는데 친구들은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집중해서 그릴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냥, 이라고 답했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으나 거절 당했다. 그 당시의 나는 꽤 모범생의 축에 속했으므로 부모님의 설득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수긍했다. 다만 포기가 아닌 꿈을 유예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직장인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느새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문득 그리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그 안에는 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꿈의 유예만을 일삼고 있다. 꿈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살아남기를 하느라 잊혀진 것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이라는 매체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상상하고, 그러면서 소통하고 치유받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니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바쁘다고 해서 더이상 유예할 이유는 없다. 이걸 깨닫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행에서 돌아와 먼지가 쌓인 아이패드의 전원을 켰다. 흰 도화지를 만든다.
그 위에 점을 찍는 순간, 다시 시작. 꿈의 재개였다.
여행 끝에 기차에 올랐다. 천천히 출발하는 기차, 조금씩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목적지는 내가 떠나 왔던 곳이겠지. 매번 여행의 끝은 아쉬워서 계속 곱씹어 보게 되는 까닭이 된다.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의 초입은 터널이 매우 길었다. 암흑 속을 달리다가 그대로 잊혀져 버릴 것 처럼 긴 터널. 그래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1분, 2분… 5분이 지나도 앞이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밖으로 나오는 순간의 포착을 포기하고 동영상의 정지 버튼을 누른 순간 새하얀 설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아, 조금만 더 찍었으면 됐는데.
이것이 참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무궁무진해서 어느 곳이 앞이고 뒤고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인지, 이 길의 끝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는 끝나거나 언젠가는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도 내가 온 길도, 남은 길도 가늠할 수 없기에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끝을 모르더라도 묵묵히 시도하자. 내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지속하면 그 끝에는 멋진 설산의 절경과 같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여행은 언제나 설렌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한 문장 만큼의 여운을 남긴다.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