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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느 3월의 코타키나발루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저장하기 위해

by 이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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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다. 출발 전날, 일기예보에서는 ‘뇌우를 동반한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일 년 전부터 손꼽아 기다려온 여행을 날씨 때문에 망칠 순 없는데. 날씨를 바꿀 수는 없으니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여름 옷을 챙겨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도 겨울에서 여름 나라로 가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서 충분히 좋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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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해가 막 떠오르던 이른 아침, 공항 밖으로 나서니 맑은 새소리와 함께 붉게 물든 하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역시, 불안과 걱정의 구십 구 퍼센트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 쓸데없는 걱정이라던게 사실이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코타키나발루는 선셋으로 유명한 도시인데, 가장 큰 문제는 날씨가 꽤 변덕스럽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날씨만큼 변수가 가득했던 여행이었다. 생각보다 변수는 많았고 계획은 계속 틀어졌다. 예상치 못한 일로 기분이 상한 날도 있었고, 기대했던 장면을 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속에서 좋은 순간들은 늘 존재했다. 익숙한 일상에서 놓치고 살았던 것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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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 사진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바다의 색이나 표면의 모양같은 것들. 늘 그런 사진을 찍는 나를 옆에서 빤히 보던 남자친구는 묻는다.


‘너는 왜 늘 바다 사진을 찍어?’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엔 늘 바다가 함께 있었다. 같은 바다라도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수심의 깊이나 파도의 파동이 달라지고, 색도 다양했다. 심지어 같은 장소라도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 시원하고 고요해지는 그 느낌도 참 좋았다. 결국 돌고 돌아 ‘그냥 좋아서’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문득, 이유 없이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햇빛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사람을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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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셋째 날, 우리는 한 시간동안 모래사장에 남겨졌다.


해 질 때까지 한 시간 정도 여기서 기다리세요.


가이드가 말했다. 난 반딧불을 보러 왔는데. 한 시간이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해는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붉게 물드는 하늘, 노을을 담고 연달아 굽이치는 파도와, 잔잔하게 배경음처럼 깔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뒤를 돌면 보이는 무지개,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이 모든 것들을 함께 보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아, 그래. 이게 내 행복이구나. 그건 영화처럼 선명하게 각인될 장면이었다. 그리고 난 그 순간을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마음 속에 저장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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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넷째 날, 거리 산책을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


가만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서든 놀랄 만큼 비슷하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구경하고, 즐겁게 웃고 떠든다.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소한 일상에 기분 좋은 웃음을 더한다. 카페에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평일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누군가는 여전히 일하고, 누군가는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즐긴다. 늘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 낯선 도시 한복판에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타지에 있음에도 묘하게 그리운 정취가 느껴졌다. 그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셨던 커피 한 모금의 달콤함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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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여행 막바지다. 여행이 끝난 다음엔 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여행이 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여행이 여행일 수 있는 까닭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니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의 시간을 뒤로하고, 그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쉽고도 좋았다. 비행기에 올라 이어폰을 귀에 꼽고 여행의 마지막 노래를 재생한다. 이번 여행에서 노을이 지는 바다 앞에서 함께 들었던 <West Coast Love>를 재생하며 창 밖을 내다본다. 비행기가 이륙해 하늘에 닿는 순간, 노을이 지는 바다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래에서 보던 노을과는 또 다른 장관. 작아 보이는 땅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때로는, 그 고민들도 이 장면처럼 작고 아름다울 수 있겠다고.


집에 돌아와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화했다. 작은 상자에 담고 이름을 붙였다. 순간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며 기억을 붙잡으려 하는 걸까.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할 행복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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