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삶
퇴사 직후 마냥 행복했던 것은 날씨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여름이 지나간 후였으니, 돌아다니기 딱 좋고 발길 닿고 눈길 닿는 모든 게 그저 아름다운 시기. 한편, 백수로 맞이한 이 첫 번째 여름은 만족스러운 듯 불만스럽다. 덥고 비 올 때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 점은 좋으나, 더워서 실내에만 있자니 기분도 몸도 축축 가라앉는다. 어쩌다 한번 집에 있어야 좋지, 계속 집에 있으면 동굴 안 원시인이 되는 기분이다. 나는 집 안에서 뭔가를 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책도 읽기 싫고 영화도 보기 싫다. 나가서 햇볕과 바람을 쐬고 싶다.
(쿠키)
요즘 디저트와 빵을 자꾸 구매하게 된다. 자꾸 사고 싶어 져서 왜 이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일종의 시발비용 같다. 백수가 시발비용이라니 웃긴 이야기이지만, 못 사 먹는 상황이 스트레스라서 사고 싶어지는 거다. 하필 디저트인 이유는, 필수재가 아니면서 예쁘고, 효용 대비 고가인데 못 살 정도는 아니니, 큰 무리 없이 플렉스 할 수 있는 적당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디저트 가게는 내부도 잘 꾸며놓기 때문에 폼 잡고 책을 읽으며 시간 보내기에도 좋다. 물론 SNS 영향이 제일 크다. 남들이 베이글이니 크루아상이니 나만 알고 싶은 곳 어쩌고 하며 자꾸 올리니.
거의 매일 카페에 가서 핸드드립 한 잔과 구움 과자를 시켜 먹던 나날이 전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때도 디저트가 먹고 싶어서 시킨 건 아니고 허전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주문하던 것이니, 디저트가 그리운 건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것에 돈을 써도 아깝지 않던 넉넉한 지갑이 그리울 뿐이다.
추석을 맞이하여 나에게 줄 선물,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쿠키세트를 보다가, 결국 포기했다. 몇 개 담다 보니 금방 4-5만 원이 찬다. 쿠키는 대체 왜 이렇게 비싼가. 내 일주일치 식비네. 아, 물론 지금도 사놓고 다 못 먹은 쿠키 3종이 부엌 찬장에 있긴 하다. 다만 이십 년 전 어릴 때에도 쉽게 주문하던 것들을 이제는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며칠 동안 고심하다 결국 포기하는 상황이 - 애초에 건강문제로 디저트를 끊어야 하긴 하지만,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 - 좋은 듯 나쁜 듯 기분이 어정쩡하다. (기분이 좋은 건 쿠키의 유혹을 이겨서. 기분이 나쁜 건 돈을 마음껏 쓰지 못해서.)
참고로 예전에 주로 사던 쿠키는 위캔쿠키와 메종엠오, 가끔 껠끄쇼즈. 문득 케빈즈파이가 생각나서 찾아봤는데, 작년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이제 영업을 중단한 것 같다. 아쉽네. 하기야 처음엔 고급 파이의 대명사였지만 이제 훨씬 쟁쟁한 곳들이 많아졌으니.
(차)
최근에 Tavalon 티백을 선물로 받았다. 포장이 아주 고급스러워서 (과대포장이라는 뜻) 대접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는데, 막상 내려보니 와 맛있다 싶지는 않다. 이거 얼말까, 비싸겠지, 싶어서 찾아보니 예전에 내가 마시던 것보다 비싸지 않다. 예전에 애용하던 건 TWG, AC 퍼치스 티핸들, 허니 앤 손스. 지금은? 이마트 노브랜드 제품으로 산다. 가격이 최대 12배 차이인데, 워낙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에 무조건 저렴한 것을 고른다. 선정 기준은 딱 하나, 생분해성 티백필터를 사용하는지만 본다.
(샴푸)
근로소득이 없으니, 당연히 과거와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는 없다. 식재료는 좋은 것으로 고르고 있지만, 옷이나 차, 커피, 휴지, 샴푸 같은 것은 저렴한 것을 산다. 예전에는 200ml에 2-3만 원대 가격의 샴푸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500ml에 7천 원짜리를 쓴다. 오늘 아침, 마트마다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한 후 가장 저렴한 곳에서 샀다. 과자나 디저트도 입에 들어가는 것이니 좋은 것으로 골랐는데, 어차피 몸에 안 좋은 거 그냥 천 원 샵 같은 데서 살까 싶은 생각도 든다. 자꾸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니 못 끊는 것이 아닌가, 저렴하고 맛없는 거 먹으면 오히려 쉽게 끊을 수 있지 않을까.
(버스)
버스비 1500원이 아까워서 33도 한낮에 다섯 정거장을 걸어왔다. 뭐, 3km 밖에 안되긴 했다. 순환버스나 마을버스를 타게 되면 각각 100원, 300원이 저렴해서 무척 기분이 좋다.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신난다. 이런 건 확실히 어느 정도 타고난 성향이 있어야 하지 싶다. 소소한 거로도 행복을 느끼니 나름 행복 효율이 좋은 몸이다. (반면 실수로 환승할인 못 받으면 세상이 무너진 듯 억울하다.)
한 친구는 내 이런 모습을 보여 우려한다. 어떻게든 소득을 늘릴 생각을 해야지 지출을 옥죄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나는 딱히 직장 다니는 것 말고는 돈 벌 재주가 없기도 하고, 소비하지 않는 삶에 경도되어 있기도 해서 자의 반 타의 반 이렇게 살 듯하다. 이렇게 소비를 줄이고 저렴한 상품으로 대치하는 것이 조금 찌질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로 인해서 의기소침하다거나 우울해지지는 않는다. (홧김에 지르는 일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한창 젊은 친구들이 커피+빵 만원이 합리적이라느니 할 때 위화감을 느낀다. 그 친구들은 보고 자란 게 그 가격이라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보다 엄청나게 저렴했던 가격을 기억하고 있으니 거부감이 있는 것이고.
한국노총에서 발표한 표준생계비가 있는데, 아무래도 임금협상을 위해 부풀린 면이 좀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르겠지만. 내 기준으로 보면 단신 가구 월 280만 원은 엄청나게 풍요로운 삶이다. 올해 내 지출 예산이 월 160만 원 정도인데 실제로는 그보다 적게 사용하고 있으니. 물론 여행도 안 가고 사람도 안 만나고 취미는 무료로 할 수 있는 것만 찾아다니고 있어서 그렇긴 하다. 표에서 주거비가 97만 원으로 되어 있는 걸 보면 아마 월세나 대출 이자 포함인 것 같은데, 그럼 17만 원쯤 관리비로 잡고 80만 원을 제하고 보자. 월 200만 원, 지금의 나보다 한 달에 40만 원 더 쓰는 삶이 표준 생활인가 보다.
(알바)
그럴듯해 보이는 알바 공고를 보았다. 요즘 24시간 무인점포들이 많이 생기고 있어서 해당 점포를 매일 한두 시간 정리해 달라는 알바 공고가 종종 나온다. 마침 집에서 가깝고 일이 어렵지도 않아 보여서 할 생각이 없으면서도 해보고 싶어지는 자리였다. 한 달에 세후 44만 원. 딱 표준 생활비 부족분만큼을 채워주는 금액이다. 한번 지원해볼까 싶었다. 그런데, 돈이란 참 묘하다. 월 44만 원이면 지금 생활비 60만 원 대비 엄청 큰돈인데, 돈 버니까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샌드위치 먹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돈이다. 역시 나는, 더 벌어서 더 쓰는 것보다 안 벌고 안 쓰는 게 더 체질에 맞는 거 같다.
그런데, 여기 좀 이상한 반전이 있다. 나는 하루하루 고작 몇 백 원에도 부들거리며 쪼잔하게 살고 있는데, 내 총 자산평가액은 퇴사 이후 1억 정도 증가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자산 평가액보다 현금흐름이 중요하다, 있는 놈들이 더 하다, 아끼고 사니까 자산이 불어나는 거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착시다, 돈 굴리는 재주가 없으면 자산이 있어도 불안하다. 그렇다. 불안하다. 10년 후, 30년 후, 50년 후, 알 수 없는 미래가 불안하다. 그런 것 치고는 태평하고 게으르게 살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