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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ie Coree May 18. 2024

용서하는 일과 용서받는 일(2)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The Sunflower』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The Sunflower:On the Possibilities and Limits of Forgiveness』를 읽고


https://brunch.co.kr/@yuiecoree/205

에 이어서 작성.


  먼저,

2부 심포지엄을 읽는 동안, 이 책에서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용서'나 '참회', '죄', '죗값' 등의 주제와는 다소 무관하지만 새삼 돌아보게 만든 한 가지는 이거였다.


'침묵이나 무언의 행동은 로르샤하랑 닮은 데가 있구나.'


  로르샤하 테스트는 심리 검사 중 하나로, 데칼코마니로 구성된 애매하고 비언어적인 이미지들을 보고 떠오른 심상을 바탕으로 심리를 파악한다. 같은 무늬를 보고도 사람에 따라 저마다 긍정/부정적인 단어나 묘사를 떠올릴 수도 있고, 특이/일반/이상/정상/병적인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내가 그 테스트의 분석 기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별개로 방법론상의 이야기다.)


시몬이 처했던 상황은 분명한 문장으로써 묘사되긴 했으나, 그가 취한 '침묵'으로 일관한 일련의 행동은 일종의 로르샤하 그림 같은 효과를 낳은 듯했다. 


예를 들어, 


시몬은 카를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실제로는 용서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본다면서도 나치의 만행을 방관하는 것이 악랄한 행동이라면 시몬이 카를을 방관한 것도 (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비인간적이었던 건 마찬가지 아닐까라는 답을 한 이도 있고, (p.220-223, 에드워드 H. 플래너리) 

곁에 앉아 손을 잡도록 두거나 파리를 쫓아주었던 그의 행동은 용서나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류에 속하도록 용납해준 것이며, 카를이 원래 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위안을 가져다 준 셈이라고 말한 이도 있고,(p.346, 에릭 H. 로위)

시몬은 카를을 단죄했다고 표현한 이도 있다. (p.422, 마네스 스페르베르) 


마찬가지로, 카를의 어머니를 마주했을 때 시몬이 카를의 죄에 대해 침묵한 것에 관해서도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는 이들이 있고

진정 그녀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진실을 알게 하여 자신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음을 깨닫고 성장할 기회를 주어야 했다)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다.


용서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대체로 공감 가능한 답변들이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앙드레 스타인의 글(p.424-432)에 가장 공명한 것 같다.



  한편, '시몬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카를에게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해 나도 생각해 봤다. 


  우선,  내 성격과 기본 사고 회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상태라면 아마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나름의 납득이나 결론을 얻을 때까지 조곤조곤 따지거나 화를 내면서도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대화를 시도했겠지.

  혹은 그러기엔 이미 너무 지치고 허망해서 나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을 수도 있다. 시몬처럼 온갖 생각이 난무하고 답을 내리기 고민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게 귀찮아져서 말이다. 

  또 어쩌면 극도의 긴장 속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미처 모른 채 얼떨결에 충분한 고찰 없이 그를 용서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고, 

  그냥 "싫습니다"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부 심포지엄에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답한 사람들은 대체로 '왜 용서가 불가능한지' 또는 '왜 용서를 하면 안 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용서하기 싫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추후 혹시라도 발견하면 수정하겠다. 원문으로 다 읽은 게 아니라서 장담할 수도 없고). '싫다'라는 표현은 설득이나 주장 전개를 위한 지적 언어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니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용서할 수 있다 혹은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겠다고 답한 이들 중 일부가 무조건적 관용과 초인적 사랑으로써 논리와 감정을 극복하려는 것과 대조적이라면 대조적이기도 하다.


  나는 논리를 넘어서고 말고 할 것 없이 그 이전의 문제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윤리적 명제를 일반화시켜 객관적으로 용서해야 하는지 혹은 불가능한지를 가리는 사고 과정은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떠나서 내 행위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내 행위는 그보다 심플한 조건에 의한다. 모두가 '하는 게 도리'라고 해도 내가 암묵적으로라도 납득한 의무가 아닌 이상 하기 싫으면 않을 것이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고 싶다면 시도는 할 테니까. 시몬의 질문은 분명 '일반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옳았겠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였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가 아닌가 혹은 그게 가능한가 아닌가는 적어도 내가 그를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든 후에나 따질 일이고, 카를을 직접 마주하지 않은 나는 아직 모를 일이다. 


  결과는 더욱 심플하다. 사람이 보기에 이르든 늦든 우리는 각 자신의 행위대로 돌려받는다. 소신대로가 아니라, 행위대로. (늘 오차 없이 소신껏 행하는 사람에겐 그게 그거겠고 그에겐 기적이 곧 일상이겠으나.) 


  (심각한 논쟁이다 보니 나도 덩달아 처음엔 복잡하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실상은 의외로 그렇게 심플한 건지도 모른다. 즉 시몬이 카를처럼 용서를 구할 일이 없는 이상은 거리낄 것 없이 용서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그뿐인 문제였지 않을까. 짊어져야 할 짐은 남들의 사상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행위이므로. 게다가 진심 없이 껍데기 말로만 용서를 할 수도 있듯, 분명하게 용서를 단언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단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카를의 몫이며, 시몬이 용서하더라도 피해자 몫의 용서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몫이고, 시몬이 용서를 않더라도 카를은 이미 53인의 패널 중에서만 해도 몇 명에게나 용서를 받았으니 말이다. 

  카를로서는 진정 용서를 얻고 싶었다면 무작정 호소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 상대가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좀 더 생각해 봤으면 좋았으련만. 자기 자신에게 압도된 나머지 상대로 하여금 용서해 주려다가도 '해주기 싫은데요'라는 기분이 들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용서를 해야 한다 vs 아니다, 용서 가능하다 vs 불가능하다-라는 건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용서라는 게 의무나 권능으로 하는 것인가.




  또 하나.


이 책에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은 당사자 외에는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용서의 범위가 다를 수 있다. 피해자를 아끼던 사람들에게도 결과적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그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용서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예로 류찬하의 장모가 될 뻔했던 분이 떠올랐다. 류찬하는 약혼한 여자 친구를 우발적이지만 190년쯤 맺힌 전생의 한이라도 풀듯 잔혹하게 살해한 흉악범이다. 처음 관련 기사들을 읽었을 때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했다는 말이 사뭇 황당했다. 

  "네가 내 딸을 사랑했으니까 죗값 달게 받고 나와라. 죗값 다 받고 나오면 용서할게." 


사랑했던 약혼자...맞나? 맞다고 쳐도-

당한 건 피해자인데 왜 어머님 맘대로 용서해요? 뭘 어떻게?

...

이건 

내가 만약 피해자였다면-이라는 가정의 심정이지만,

곧 모순을 깨달았다. 

왜냐면, 만약 피해자가 내 딸이었다면- 고작 20여 년 복역 따위로 용서는 개뿔, 설령 그놈에게 191년간 일년에 한 번씩 같은 날 같은 시각 피해자와 똑같이 당하는 증강현실 악몽에 시달리는 형벌을 준대도, 그놈이 반 병신이 되어 한오백년 죽도록 참회하지 않는 이상 진심으로는 용서가 안 될 것 같은데. 싶었기 때문이다.(역으로, 진정 뉘우치고 속죄한다면 어쩌면 용서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


  그러니 내가 만약 카를을 용서하고 싶다고 생각했더라도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몫의 용서는 하겠지만 피해자들의 몫은 저세상에 가거든 거기서 다시 구해 보십시오. 수백 명 모두- 한 명, 한 명에게 따로 말입니다."


  카를이 만약 피해자들과 저세상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과연 시몬에게 용서를 구한 것과 같은 절실함으로 수백 번을 한결같이 반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시몬에게 용서를 구하는 한 번으로 수백 명 분의 용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혹 그렇게 날로 먹으려는 심보라면 하려던 용서도 취소하겠다. 

  (류찬하가 유족에게 사죄의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기만 했다는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혹시 변명하는 것조차 너무 죄송해서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류찬하가 항소를 했을 때, 내가 피해자의 모친이었다면 나중에라도 용서하려던 마음 따위 싹 접었으리라 느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범죄를 줄이는 방법을 논할 때, 범죄자에게 보다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입장사회문제 및 갱생에 힘쓰는 편이 결과적으로는 범죄를 더 많이 줄인다는 입장이 대립되고는 한다. 양쪽 다 일리는 있다. 다만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두 방법 중 어느 쪽이든 결국은 산 자들을 위해 산 자들이 택하는 것일 뿐이다. 피해자는 죽은 것도 억울한데 서럽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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