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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ie Coree Feb 19. 2024

용서하는 일과 용서받는 일(1)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The Sunflower』

https://brunch.co.kr/@yuiecoree/192

에 이어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를 다 읽고 작성...하려 했으나, 중간 기록.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책이 즐비한 곳을 지나가던 중에 어째선지 이 책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목했다가 느닷없이 느낌표가 강타했다.


어... 어?

저자. 시몬 비젠탈!


홀린 듯이 집어 들고 훑어보다가 멍해졌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와의 대담>에서 거론된 그 시몬 비젠탈의 바로 '그 이야기'가 쓰인 책이잖아.


!


원제인 <The Sunflower>는 기억하고 있었고 언젠가 기회 되면 읽어볼까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독서 예정 리스트에 넣어두지는 않은 채였다. 그래서 한국어판은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제목이 이거였던가? 알고 보니, 한국어판도 처음에는 2005년에 <해바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2019년에 같은 출판사와 번역자가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바꾼 거였다.


게다가 이 무슨 우연인지, 이 책 번역자의 기 번역서 중에는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가 있다. 작년부터 천천히 음미 중인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다 읽은 후에 언젠가 기회 되면 읽어볼까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리스트에 넣어 두지는 않았던 빌 브라이슨의 저서!

  이런 신통한 순간을 마주할 땐 왠지 아무래도 이 책이 나를 부른 듯한 착각마저 드는 것이다.


  A5 정도 사이즈의 470여 쪽에 달해 아담하면서도 뚱뚱한 두께지만, 1부 The Sunflower는 전체의 1/3 가량. 나머지 2부는 일종의 심포지엄으로, 어떤 식으로든 1부의 소재와 연관성이 있으며 자기 분야에서 한가닥씩 할 53명의 인사들이 '내가 시몬 비젠탈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쓴 답으로 채워져 있다. (루이제 린저의 답변은 원서에서도 개정하면서 뺐나 보다.) 


  The Sunflower만 놓고 보면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소름돋게 구구절절 극적이다. (어쩌면 일부 각색된 부분도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비치는 사람도 있다. 로버트 콜스-p.203, 크리스토퍼 홀리스-p.293) 나치의 만행은 당위성이나 개연성을 무시한 현실이었으니, 나치 역사가 소설이라면 그야말로 작위적이라는 평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배경부터 전개와 결말까지 플롯을 절묘하게 잘 짜서 만든 영화처럼 흘러가는 상황 때문인지, 대중적인 문장력이 뛰어나서인지, 번역이 훌륭해서인지, 그것들의 복합인지, 술술 읽힌다. 

  술술 읽히지만 결코 책장을 휘리릭 넘기지는 못했다. 때때로 가만히 책을 덮고서 생각에 잠겨야 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뜻하는 바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큐멘터리 <Take Five>의 어안이 벙벙해지는 장면들이 이미 뇌리에 새겨졌기 때문인 것 같다.


  1부가 드라마 같았다면, 2부에서는 53인이 내놓은 각양각색의 예리한 통찰들이 날선 현실로 다가온다. 주석이 꼼꼼히 달려 있음에도 막힘없이 읽어 나가기엔 내가 모르는 것도 많다. 저마다 몇 페이지 정도씩만 의견을 써냈음에도, 마치 책을 한 권씩 압축해 놓은 듯하다(그 몇 페이지를 늘려서 책을 쓸 수도 있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나로선 주석만 보고 넘어갈지 겉핥기라도 탐구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한다.


 286쪽에 다다른 즈음까지는, 적어도 2부의 주제에 한해서만큼은 에바 플레이슈너Eva Fleischner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했다. 요시 클라인 할레비Yossi Klein Hallevi의 이야기는 한국의 상황에도 모범적인 참고가 될 듯하다. 호세 호브데이José Hobday의 답글은 생각에 잠기게 했고, 나를 좀 더 성장하게 했다. 


...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글쎄. 용서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각자의 머릿속 사전마다 조금씩 다른 뉘앙스이지 않을까. 

  나는 미워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미운 티를 내지도 않고 마음이야 모두를 배려하고 싶지만, 아직 온전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와 살갑게 지내지도 않고, 당한 일을 애써 잊지도 못한다. 나도 모르게 잊는다면 그건 이미 용서에 대해서 더 생각할 의미도 없는 것이고, 바꿔 말해 '용서했다'는 마음조차 잊어야 진정한 망각이 된다.(겨우 미움이 삭아들어 용서하고 잊고 잘 살다가 문득 떠올랐을 때 덤덤하다면 정말 용서된 것이겠고, 다시금 벌컥 스트레스 수치가 오른다 방어기제가 작용했거나 머리로만 용서한 것이겠지. 떠올라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괜찮아졌는데 그 원흉이 새삼 괴롭혀서 새롭게 미워지는 경우도 있으리라. 죗값을 충분히 치르지 않은 용서는 재발을 야기하기 십상이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용서받아야 할 상대에게는 아예 잊혀지고 싶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또 하나 다져진 생각.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지만, 집단은 개인을 고스란히 포함하진 못한다. 아니, 고스란히 포함해선 안 된다. 우리의 정신이나 행태는 모든 측면에서 균질하고 동일하게 대량 생산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집단이라는 테두리 원 속에 각 개인은 발 한 쪽만 집어넣고 있는 게 건강하다. 그 원 속에 자신을 올인하는 순간 카를 같은 비극이 생겨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카를이 시몬에게 용서를 구한 행위에 대해서조차 수많은 이들이 비난한 점 중 하나는 카를이(나치가) 시몬(각 유대인)을, 자아를 가진 개인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집단적 존재로 인식했다는 사실이었고 말이다. 내가 외국에서 내가 원하든 아니든 마치 한국인 대표가 된 것 같은 취급을 받을 때의 불편함을, 내 일거수일투족이 한국인의 그것으로 대변되는 듯하던 그 당황스러움을 어찌 잊으랴.




https://brunch.co.kr/@yuiecoree/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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