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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ie Coree Aug 27. 2023

타자의 비극을 바라보는 자세와 용서에 관하여

<엠마누엘 레비나스와의 대담>

https://brunch.co.kr/@yuiecoree/151  

에 이어 <엠마누엘 레비나스와의 대담>을 읽고 작성.



  전쟁 역사, 아니, 정치 역사에는 세계 어디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 셀 수도 없고 현대는 대학살이라는 야만적 단어와 일견 무관해 보이지만, 결코 지나간 세대의 흔한 이야기로 여길 수 없다. 생존 피해자나 직계 유족 중 아직 살아 있는 분들도 있고, 1994년 르완다 학살의 경우, 주범 한 명은 불과 몇 달 전에서야 붙잡혔다.

  


 그런데. 아래는 홀로도모르(소련이 우크라이나 농가의 수확을 강탈해 수백만 명의 아사를 야기한 대기근)를 설명한 위키백과 항목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이미 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충격적이어야 할 피사체들보다도 그 아래 설명이 더 눈에 들어온다. '기근으로 쓰러져 있다' 정도면 충분할 텐데, '널브러져 있다'도 아니고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다'라니. 지식백과지 교양백과는 아님을 모르지 않으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있지만 설령 시체라 해도 좀 무례한 표현 같다.(순간 나무위키인 줄.)






BGM. (모바일에서는 동영상을 배경음악처럼 재생하면서 본문을 읽을 수 없어 아쉽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0YONAP39jVE


   <엠마누엘 레비나스와의 대담>

  레비나스는 나치가 자행한 쇼아(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철학자다. 그의 제자가 저술한 책으로, 그와 나눈 대담을 비롯하여 사르트르, 후설, 카프카, 베르그송, 하이데거, 로젠츠바이크, 앙드레 말로, 한나 아렌트, 탈무드 등과 비교 성찰한 내용이 담겼다. (고명하신 철학자들이 으레 그렇고 번역서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독자가 자기 말을 너무 쉽게 알아들으면 싫어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말미에 실린 시몬 비젠탈의 이야기와 '용서'에 대한 사상가들의 의견이 인상 깊다.

  그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제2차대전에서 온몸을 부상당하고 얼굴도 붕대로 칭칭 감아서 앞도 못 본 채 죽어가는 독일군이 있었다. 그는 누구든 유대인을 찾아 병실로 불러 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잔혹한 학살에 가해자로서 참여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 유대인 시몬은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간다. 그 후 시몬은 그 독일군의 모친을 만나는데, 모친이 말한다. 자기 아들은 어릴 때부터 정말 착한 아이였다고, 나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어머니'는 숭고하지만 타인의 엄마는 어리석고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시몬은 당신의 아들이 한 짓을 이야기하지 않고 헤어진다. 그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까.


  대부분의 반응은 이랬다. '잘못된 행위에 대한 용서는 그 일을 당한 피해자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당한 사람 몫만큼의 용서는 신이든 사람이든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건 죗값을 치르는 것과는 다른 사항이라고.


  범죄자들이 형벌을 마쳤다고 하여 그게 용서 받은 걸 뜻하는 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죽임으로 인한 죄는, 설령 죗값을 치르더라도 용서받을 기회를 영원히 잃는 셈이다.


  그런데 엄청난 아량을 가진, 교사 출신 작가이자 정치가 루이제 린저는 이런 식으로 답했다. 심신이 망가진 채 이미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며 회개하는 군인에게 말이라도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 수 있지 않았느냐고. <Five Came Back>처럼 그 광경을 보고서도 나온 말인지, 만약 피해자들이 독일인이고 나치가 유대인들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말했을지, 궁금하다. 그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하느니, 입이 열 개라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았다. 열 개의 손가락을 꽁꽁 묶어서라도 아무 답도 쓰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루이제 린저에 대해 조사하다가 드러난 흥미로운 사실은, 아마 자기 소설 못잖게 자기 인생도 소설이었을 거라는 발각이었다. 정치가를 겸하면 거짓 인생으로 들어서는 건 정녕 어쩔 수 없는 걸까. 인생도 '그럴싸한 말뿐(짝퉁)'이었던 그는 과연 용서라는 단어의 뜻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썼을까. 어떤 일을 용서한다는 건, 적어도 그만한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쩌면 감히 가늠도 못할 기능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그 자신도 언젠가 자신의 거짓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쓴 포리스트 카터의 실체를 알았을 때 느낀 충격 만큼은 아니지만, (루이제의 소설은 읽은 바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언어'를 참 고급스럽고도 하찮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BGM:

  배경 지식을 얻기 위해 검색한 것 중 'אבינו מלכנוAvinu Malkeinu'의 선율이 마음을 적신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고 싶게 만드는 곡. 이 가수가 절정에 이를수록 한을 절제하면서도 폭발하듯 노래하기 때문인지, 모던 판소리 버전으로 불려도 혼을 울릴 것 같다.







아래 글도 추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많다.


https://brunch.co.kr/@eunchaepapa/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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