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가 나치 시절 잘 먹고 잘 살았다거나 사르트르와 까뮈가 사이가 안 좋았다거나 하는... 그러니까 작가나 학자의 인종이나 배경, 뒷 이야기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상태에서 작가/학자의 텍스트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걸 알고 나면 읽기도 전에 해석이 시작되어 버릴 것 같아서...
그러나때로는, 그런 배경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서야 이해가 되는 학자/작가도 있다. 예를 들어 생 떽쥐베리가 전시에 파일럿이었다는 걸 알면 그의 글이 좀 달리 보인다. 레비나스의 글과 사상도 마찬가지다. 그가 유대인이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 속에서 살아남았으며, 유대교 경전인 탈무드와 토라와 구약을 유대인에게 가르치는 랍비 학자였다는 사실...
"현현은 어떤 나타남 그 이상이다. 그것은 무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떤 신적 계시와 유사하다..... 인간의 얼굴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죽음의 환기이고 상기이다. 인간의 얼굴은 허약함과 불행에 대한 준엄한 상기만큼이나 인간성의 흔적과 반영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63.
타자, 초월의 현현
우린 신을 보지 못한다. 그 초월적 존재의 드러남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것뿐인가. 나도, 그대도 이 세상에 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얘기한 것처럼 생명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이 우주에서 왜 우리가 생명을 갖고 살고 있으며, 이 생명으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 우리가 모르는 초월이 있다. 저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을 해석하면서 그의 철학이 출발하는 지점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이 얼굴의 마주 봄, 그리고 그 마주 보는 얼굴의 대량 소멸, 즉 유대인 학살을 겪은 후 살아남은 이의 삶의 숙제와 과제, 채무감이다. 철학을 할 수 없는 시대에 철학을 해야만 한다면, 그 제1 과제는 무엇이냐는 자문에 레비나스의 윤리라고 했었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윤리이고, 산 자에게 임재해 있는 초월에 대한 윤리다.
"자아가 대상으로 포착되는 추상적 순간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타자의 존재이다."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는데 기준이 되는 타자의 나타남을 통해 나의 의식은 가능하게 되는데, 사르트르의 코기토는 그것이 이런 의식인 한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기만적인 접선을 만들어 낸다.",73
사르트르&레비나스
딱히 이유 없이 레비나스에 이어 사르트르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결국 내 읽기의 주제는 주체와 타자,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이니까. 이 책에서 저자는 두 학자의 물리적, 학문적 조우를 펼쳐 보인다. 내가 영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닌 모양이다.
물론 저자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인용하면서 풀어놓은 저 문장, 그 마지막 줄엔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차이가 엿보인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타자는 주체의 지옥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다. 내가 사유하는 주체임을 스스로 대상화하기 위해선 타자의 현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절대적 자유에 손실을 가져온다. 사유도, 주체도, 삶도 결국 타자의 존재로 인해 규정되니까...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윤리를 주체가 짊어져야 할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용서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집중해서, 그것도 동해선 안에서 읽었던 것은 4장, 탈무드와 유대교에서의 용서에 대한 것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유대교의 절기에는 공식적으로 신에 대해 저지른 죄를 용서받는 날과 그 의식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지은 죄를 용서받는 날이나 의식은 없다. 그건 유대교 성전에서 제사장이나 랍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성경엔 분명히 성전에 오기 전 죄를 입힌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고 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기 위해선 증인 두 명을 데리고 가야 하고, 그 용서를 거절하더라도 세 번까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결국 용서의 고백과 구함은 주체에게 있지만 그 사함은 타자에게 있다. 그 죄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다. 여기서 우리의 원죄가 있다. 신에게 저지른 죄가 우리의 원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타자에게 저지른 수많은 죄, 신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 죄가 주체의 채무감,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반 중 하나가 된다.
그건 법도, 공동체나 종교의 몫도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에 폭행을 당하고, 가족 중 누군가가 살해당했거나 다쳤다면 그 용서의 권한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있다. 난 어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밀양>의 은유를 이해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젠 다 잊으세요."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인간의 권한을 벗어나는 언사이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놀러 가다 죽은 애들 앞세워 한몫 챙기려 한다."는 말, 역시 이태원 참사에게 같은 말을 하는 창원의 김미나 시의원과 우리 장인 같은 부류의 인간들의 말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말인지 새삼 절감했다.
그러니까 그 말의 죄는 유가족의 용서가 있기 전까진 용서받지 못하는 말이다. 그 어떤 법적 해결로도, 종교적 의식으로도, 회개로도, 위선적인 헌금과 봉사로도, 그 어떤 장려하고 유려한 사과문으로도 절대 용서받지 못하는 죄다.
이 용서에 대한 인식이 영화 <밀양>에서 구체화된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가 아들을 잃고 종교에 귀의하지만 그 종교의 힘으로도 회개했다는 죄인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지점, 그리고 회개를 했으니 용서해 주라는 교인들의 위선과 위악이 드러나는 지점과 맞닿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이 원작 소설이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는 것처럼... 역사의 죄인들 또한 역사의 평가나 정치적 업적만으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 저 죽은 이들에 대해 죄를 지은 자들의 죄는 신도 어쩔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연민 없는 인간이 저지른 죄는 신도 어쩔 수 없다. 결국, 신도 어쩔 수 없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우린 타자에 대해 예민해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