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맛>을 읽을 때도, <감각의 제국>을 읽을 때도, 저자의 성별을 착각했었다. 김정선은 여자로, 권택영 교수님은 남자로.
모르는 저자라도, 직관적으로 이 책은 내가 품고 있던 문제, 또는 정리되지 않은 몇 가지 개념과 정의들을 단박에 정리해 줄 것 같은 책이라면, 덥석 사서 일단 읽는다. 그러니까 저자의 학력이나 다른 저서나 성별이나 나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사서 읽는 것이다.
이 책을 100페이지 정도까지 읽을 때는 그냥 무심히 읽었다. 그러니까 젠더에 대한 감 없이 읽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예민함, 남다른 시각, 소외된 사람과 장소에서 도저히 거두지 못하는 이 시선은, 어쩐지 남자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자에 대해 바로 검색해 보진 않았다. 오늘, 그러니까 거의 2/3쯤 읽었을 때 검색해 보니 여성이었다.
난 좀처럼 다른 이에게 책을 권하지 않는데.. 이 책은 아내에게 권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특히 봉사나 복지 현장, 낯선 이와 늘 만나야 되는 일을 하는 분들은 꼭 읽어보셨으면 한다. 게다가 이 책엔 쓸데없는 문장, (당연하겠지만) 소홀히 쓴 문장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각주조차, 사례조차 너무나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쓰여 있다. 이렇다 할 미사여구도, 형용사도, 말잔치도 없지만 읽는 내내 문장의 완벽함에 감탄했다. 물론 책의 구조 또한 완벽하다. 저자가 이 책의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의 뼈대 안에 무엇을 채울지 얼마나 고심했는지...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는지... 나 같은 아마추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빙 고프만의 여러 이론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그것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 노릇을 한다는 것이 결코 가식적인 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원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의례의 습득이자 실천임을 알게 됐다. 어쩌면 이 책을 기점으로 광고와 소비, 마케팅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사람...
저자는 사람에 대한 정의부터 명쾌하게 내리고 들어간다. 내가 다른 칼럼에도 인용했듯이 그의 정의는 인간과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말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에게 성찰이 필요함을, 고민이 필요함을 강요한다.
사람의 자리...
사람의 자리는 사회가 마련해 준다. 그 사회는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상상적 공간이다. 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정신, 그 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된 가상의 테두리, 그 테두리 안에서 서로 연대하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의해 새로이 들어오는 타자에 대한 인정과 그 타자를 위해 마련된 자리. 이러한 선순환으로 인해 한 사회는 그 고유의 자리,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영역을 차지하며 유지된다.
환대
여기에서 환대의 논의가 제기된다. 타자와 환대의 논의는 과거 다른 칼럼에서 인용했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논지를 통해 본인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낯선 타자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가의 문제를 말이다. 저자는 환대에 대한 여러 논의-칸트, 데리다 등-를 조목조목 따져본 뒤 명쾌하게 정리한다. 솔직히 그 정리, 그 정의가 상당히,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이어서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리와 정의는, 반대로 그 환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지금 이 사회, 이 순간, 함께 고민해야 될 문제이기도 하다.
모욕, 낙인, 스티그마
개인적으로 이 책의 중간 부분을 장식한 이 내용들을 읽으면서 제법 많은 맥주를 마셨다. 많은 이들이 사회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경우를 당한다. 나 또한 평택의 촌동네에서 그런 경험을 당한 적이 있다.
사족...
이건 좀 다른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다가 생각난 건데, 의외로 울산의 공무원이나 고객, 또는 감독의 울산 토박이 지인들은 나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고향이나 나이, 출신 학교와 같은, 그러니까 한국 사람이 낯선 사람을 만나면, 고향의 사투리를 쓰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궁금해할 것들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가끔 대화 중에 집이 울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집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아 봤어도... 그 외의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지점이... 그러니까... 최소한 내가 만난 울산 사람들의 무덤덤함이 나를 편하게 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생각해 보니, 감독이 내 히스토리를 다 안 것도 불과 이삼 년 전이었다. 어쩌면 감독이 아는 사람들은 감독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무원을 비롯한 다양한 고객들도, 일만 잘하면 장땡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런 여러 입장과 생각들이 맞물려서.... 울산에서, 감독의 장소 옆에 내 장소가 마련 됐는지도 모르겠다. 2022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