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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22. 2023

자아의 초월성 - 장 폴 사르트르

동해선에 읽은 책  11

애초에 그런 나는 없다.

정석대로라면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는 것이 맞다. 그것이 편하다. 내 경우, 그러니까 이전 글에도 썼듯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 느낌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와중에 칸트를 스쳤고, 칸트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전에 사놓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칸트가 얘기한 그 초월적 자아, 세상을 인식하는 그 신적인 존재에 대해 사르트르는 뭐라고 했을까?


데카르트와 칸트, 그 후의 인식론과 현상학은 세상의 중심에 "나"를 둔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을 인식하는 "나"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그러니까 인식하는 존재가 자아, 그 자체가 된다. 사르트르가 던지는 질문은 대충 이렇다. "아니 진짜? 그냥 사건과 상황, 사물을 인식하는 그게 자아인 거야? 그 뒤에, 뭐 그럴듯한 게 없는 거야?"


사르트르는 이 소위 유아론(唯我論)에서 말하는 자아를 의심한다. 그리고 반성적 인식으로 인식되는 자아가, 그런 인식을 통일하는 자아가, 그리고 통일하는 것을 통일되게 하는 그것을 자아라 부른다.


반성의 누적, 실존의 무게

결국, 한 인간의 자아는 실천과 반성, 그 반성의 통일과 그 통일로 형성되는, 또는 그 통일을 가능케 하는 통일된 무엇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세상에 대한 인식은 사는 동안 멈출 수 없고, 인식이 멈출 수 없다면 당연히 반성도 멈출 수 없으며, 반성을 멈출 수 없다면 그것의 통일도 멈출 수 없다. 결국 인식과 반성, 통일의 반복으로 인해 내가 통일되어 이룩한 자아 또한 수정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자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자아다. 헤겔의 대타자와 나와의 관계에서 사르트르는 더 나아간다. 나를 인식하는 타자의 존재가 나를 존재케 한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투쟁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나를 나이게 하는 타자의 존재가 사르트르가 말하는 타자인 것이다. 이 지점은, 이전에도 얘기했지만 레비나스와 맥을 같이 한다.


나, 지우고 만들기를 반복하는

불교의 무아론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무아론은 자신의 부정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고 죽이고를 반복하여 참 나를 찾아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 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물을 만나면 물이 되고 바람을 만나면 바람이 되는 것이다. 살면서 나를 만나고 버리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타자론은 불교의 연기론도 떠오르게 한다. 모든 만물은 인연에 따라 맺어지고 형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는 그 연기론 말이다. 이 연기론을 달리 받아들이면 이 순간의 "나"를 하나의 점으로 규정하는 것은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세상, 사람, 사물이다. 즉 밖이 있어 안이 있고, 타자가 있어 내가 있다. 밖과 타자와의 인연이 다하면 나도 없어지니, 당연히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내 밖과 타자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살생을 멀리하고 중생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심을 갖는 것도 이 인식에서 출발한다.


후투티, 햇살, 사르트르

어제, 뒷산에서 운동하고 내려오다 후투티를 만났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아 제법 가까이서 사진을 찍었다. 어제는 따뜻했지만, 오늘은 추운데,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으려나...

집에 커피 믹스가 떨어져 아내에게 눈치가 보여 바닐라 라떼를 사러 나갔다. 주문을 한 뒤, 테이크아웃을 기다리는 곳에 가 앉으려니  바리스타가 추우니 매장 안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한다. 됐다고 했다. 기다리는 곳에 앉으면 보이는 경치를 좋아한다. 박물관과 메타세콰이어와 햇살과 로터리를 분주히 오가는 자동차들... 잠시 앉아 구경했다. 사르트르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엔... 술을 안 마시려고 했는데... 마누라한테 무슨 핑계를 대나.


사족... 이 책 <자아의 초월성>과 <사르트르의 상상력>은 한 달 전쯤, 같은 날, 알라딘 울산점에서 샀다. 누가 읽고 팔았는지 궁금하다. 이 또한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인연이다. 덕분에 읽었으니.. 202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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