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0
애초에 시작은 이랬다. 한 십몇 년 전, 2006년 아니면 7년, 지인의 차에 실려 울산에 가던 길이었다. 그때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나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실제로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아가 나조차도 나를 정확히 모른다는 느낌도...
애초에 하나의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나를 인식하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니까 내 모습, 내 이름, 내 존재, 내 관계망을 인지하기 전의 나, 태어나마자의 그 존재 자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성격이나 심성은 어땠을까? 원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떻게 얼마나 다를까? 달라졌다면, 그 다름이 발생한 전환기적 사건은 뭘까? 그 전환기, 사건은 어디서 왔을까? 그 이후 난 나 자신을 망각한 걸까? 아니면 인식된 나 자신 위에 나를 건설한 걸까? 뭐 이런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직업과 전공과 관련 없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겠지만(아니 믿을 수 있으려나?), 이 사건 이전까지는 전공 관련 책(사회과학, 마케팅, 커뮤니케이션)과 추리소설만 읽었다.
라캉에서 시작한 여정은 프로이트와 융을 거쳐 바르트, 푸코, 레비나스를 끼고돌아 니체로 나아갔다. 그리고 니체가 칸트를 소환했다. 궁극의 무엇, 초월적 위치에 있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여행했다. 그들은 다 다르게 말했다. 라캉은 실재계, 융은 원형, 니체는 초인, 푸코는 권력, 그리고 칸트는 선험과 무제약적인 위치... 인간의 사유와 내적 탐구가 다다르는 곳, 또는 그 끝에서 만나는 나, 또는 어떤 존재를 이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칸트의 논리와 개념들을 따라가면서 그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거기엔 그 뒤의 철학자들이 이름을 바꿔 얘기한 존재가 있었다. 칸트는 신을 소환했다. 세상을, 자연을, 우리가 느끼는 이 아름다움을, 이 공통된 뭔가를 한 방에 설명해 주는 존재는... 그렇다. 칸트에겐 신 밖에 없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 감성을 구분해서 그 하는 일들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복잡하게 말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그 무엇, 그 초월적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선 완벽한 윤리적/도덕적 존재의 소환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유기체를 완벽하게 조화롭게 하는 그 무엇, 그 힘, 자기 원인적인 모든 생명체의 근간에 있는 것이 결국 신이라는 말이야? 아니 그럼...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신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니체 이후..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그 뒤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냉소적으로 인간의 실존의 무게에 대해 얘기한 것이 그럭저럭 이해가 간다. 그렇다. 한 마디로 열받은 거지... 자기 인식을 그 사람다움의 전제로 봤던 데카르트가 오히려 담백하게 여겨졌는지도..
칸트의 개념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가져와 쓰고 있다. 특히 유기체적인 논지에서 언급한 호혜성(reciprocity)과 그것의 설명은 요즘 읽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전공한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다. 정언명령이니 그것을 스스로 하는 시민의 자유니 하는 개념은 현재의 시민 개념, 주권자, 공화주의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인류 정신사를 완전히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맨 위에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음미해 보자. 그리고 세계 대신 삶이나 사랑, 나나 너 같은 단어를 넣어보자. 이성과 지성의 우산을 쓰고 인생과 주체를 분석하고 그 존재의 이유를 묻기 전에 존재 그 자체의 경이로움에 흠뻑 젖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일지도... 그리고 그것이 정말 신적인 존재와 만나는 초월의 순간일지도... 어째 이제 책을 그만 읽을 것 같지 않나? 사람이 그렇게 취미가 쉽게 바뀌나.. 일단 사놓은 책은 다 읽어야지.. 그리고 쓰는 사람은 읽어야 하고... 읽는 사람은 써야 하고... 쓰려면 읽어야 하고.. 뭐 그렇다.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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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속에서 칸트가 남긴 초월론적 존재에 대한 질문을 들뢰즈가 이어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