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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21. 2023

왜 칸트인가 - 김상환

동해선에서 읽은 책 10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


모든 사건의 출발점

애초에 시작은 이랬다. 한 십몇 년 전, 2006년 아니면 7년, 지인의 차에 실려 울산에 가던 길이었다. 그때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나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실제로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아가 나조차도 나를 정확히 모른다는 느낌도...


애초에 하나의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나를 인식하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니까 내 모습, 내 이름, 내 존재, 내 관계망을 인지하기 전의 나, 태어나마자의 그 존재 자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성격이나 심성은 어땠을까? 원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떻게 얼마나 다를까? 달라졌다면, 그 다름이 발생한 전환기적 사건은 뭘까? 그 전환기, 사건은 어디서 왔을까? 그 이후 난 나 자신을 망각한 걸까? 아니면 인식된 나 자신 위에 나를 건설한 걸까? 뭐 이런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직업과 전공과 관련 없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겠지만(아니 믿을 수 있으려나?), 이 사건 이전까지는 전공 관련 책(사회과학, 마케팅, 커뮤니케이션)과 추리소설만 읽었다. 


역추적-또는 계보학

라캉에서 시작한 여정은 프로이트와 융을 거쳐 바르트, 푸코, 레비나스를 끼고돌아 니체로 나아갔다. 그리고 니체가 칸트를 소환했다. 궁극의 무엇, 초월적 위치에 있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여행했다. 그들은 다 다르게 말했다. 라캉은 실재계, 융은 원형, 니체는 초인, 푸코는 권력, 그리고 칸트는 선험과 무제약적인 위치... 인간의 사유와 내적 탐구가 다다르는 곳, 또는 그 끝에서 만나는 나, 또는 어떤 존재를 이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다시 질문, 또는 질문 없이...

이 책을 읽으면서 칸트의 논리와 개념들을 따라가면서 그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거기엔 그 뒤의 철학자들이 이름을 바꿔 얘기한 존재가 있었다. 칸트는 신을 소환했다. 세상을, 자연을, 우리가 느끼는 이 아름다움을, 이 공통된 뭔가를 한 방에 설명해 주는 존재는... 그렇다. 칸트에겐 신 밖에 없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 감성을 구분해서 그 하는 일들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복잡하게 말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그 무엇, 그 초월적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선 완벽한 윤리적/도덕적 존재의 소환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니체가 열받을만해...

사람을 사람답게... 유기체를 완벽하게 조화롭게 하는 그 무엇, 그 힘, 자기 원인적인 모든 생명체의 근간에 있는 것이 결국 신이라는 말이야? 아니 그럼...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신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니체 이후..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그 뒤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냉소적으로 인간의 실존의 무게에 대해 얘기한 것이 그럭저럭 이해가 간다. 그렇다. 한 마디로 열받은 거지... 자기 인식을 그 사람다움의 전제로 봤던 데카르트가 오히려 담백하게 여겨졌는지도..


그래도 다들 빚지고 있다.

칸트의 개념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가져와 쓰고 있다. 특히 유기체적인 논지에서 언급한 호혜성(reciprocity)과 그것의 설명은 요즘 읽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전공한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다. 정언명령이니 그것을 스스로 하는 시민의 자유니 하는 개념은 현재의 시민 개념, 주권자, 공화주의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인류 정신사를 완전히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남은 과제

맨 위에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음미해 보자. 그리고 세계 대신 삶이나 사랑, 나나 너 같은 단어를 넣어보자. 이성과 지성의 우산을 쓰고 인생과 주체를 분석하고 그 존재의 이유를 묻기 전에 존재 그 자체의 경이로움에 흠뻑 젖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일지도... 그리고 그것이 정말 신적인 존재와 만나는 초월의 순간일지도... 어째 이제 책을 그만 읽을 것 같지 않나? 사람이 그렇게 취미가 쉽게 바뀌나.. 일단 사놓은 책은 다 읽어야지.. 그리고 쓰는 사람은 읽어야 하고... 읽는 사람은 써야 하고... 쓰려면 읽어야 하고.. 뭐 그렇다. 2023.0117

....

요즘,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속에서 칸트가 남긴 초월론적 존재에 대한 질문을 들뢰즈가 이어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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